20120216

침묵

원래 멋대로 쓰는 곳이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많아 덧붙인다.

아래 내용은 리포트도 아니고 정리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극히 러프하게 전개되고, 오해의 여지도 많고, 나 자신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도 많을 수 있으므로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논리 철학 논고를 읽기를 권한다.

하지만 모든 전공 분야 서적이 그러하듯이 혼자 읽으면 단지 오해만 늘어날 뿐이고 동감되는 말 찾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코칭 스탭을 찾기를 권한다. 이 내용의 그나마 가까운 형식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단상이다.

 

ㄱㅇㄱ 선생님에 의하면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이하 논고)는 (러셀의) 논리주의에 도전하는데 세가지 측면을 들 수 있다.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i) 말할 수 있는 것과 보여지는 것의 구분은 유형 이론을 통해 역설을 극복하려는 러셀의 시도를 거부한다. (ii) 논리를 공리에 근거지우려는 생각, 즉 기초적이며 필연적 진리인 공리와 정리가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따라서 논리적 공리로부터 수학적 명제들을 도출하는 것이 수학적 명제들을 보다 명증한 진리, 혹은 자명한 진리를 통해 근거 지우는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iii) 수에 대한 논리주의의 정의를 공박한다.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은 구성주의적 대안을 제시한다. 자연수는 논리적 작용 과정의 단계들을 표상한다.


 

(i)에 대해서 : 러셀은 유형 이론을 통해 역설을 극복하려고 했다. 러셀의 역설은 프레게의 논리 체계와 칸토어의 나이브한 집합론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예이다.

러셀이 들었던 세비아의 이발사 이야기를 써 놓는다.

만약 세비야에 스스로 이발을 하지 않는 모든 이의 이발 만을 해주는 이발사가 있다고 하자. 이 이발사는 이발을 스스로 해야 할까? 만약 스스로 이발을 하지 않는다면, 그 전제에 의해 자신이 자신을 이발시켜야 하고, 역으로 스스로 이발을 한다면, 자신이 자신을 이발시켜서는 안 된다.

러셀은 이 문제를 이렇게 해결했다.

예를 들어 포유류라는 집합이 있다. 이 집합의 원소인 사자, 원숭이는 유형 A, 포유류는 유형 B, 포유류를 원소로 포함하는 상위의 집합인 동물은 유형 C가 된다. 여기서 포유류에는 어떤 원소가 있을까하고 물었을 때 사자, 원숭이는 예가 될 수 있지만 포유류와 동물이라고 답하면 안된다. 유형이 다른 것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 세비아의 이발사의 경우 원소 중 하나인 세비야의 이발사가 '스스로 이발을 하지 않는 모든 이'라는 집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모순이 발생한 것이다. 아주 간단하게 '이 사과는 붉다'는 유의미하지만 '붉은 건 사과다'는 무의미하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유형 이론을 비판한다.

명제 뿐만 아니라 모든 언어적 표현에 있어서 기호와 상징의 개념을 적용한다. 여기서 상징은 명제의 뜻을 특징짓는 명제 각 부분을 말하고(3.31), 기호는 상징에서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것이다(3.32).

독일어 be 동사인 ist를 예로 들자면 ist는 계사, 동일성 기호, 존재의 표현으로도 사용된다. 즉 기호는 하나인데 상징은 다르다. 그래서 두 개의 서로 다른 상징이 기호를 공유할 수 있다(3.321). 여기서 기호는 사실 자의적인 것이며, 상징은 사용과 관련된 개념이다. 그렇다면 기호를 보면서 상징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복잡한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데 간단히 정리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적 구문론의 규칙들은 기호가 어떻게 가리키는지 알기만 하면 저절로 이해되어야 하고(3.334), 기호의 의미가 어떤 역할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3.33). 러셀의 유형 이론의 경우 기호 규칙을 세우는 데 있어 그 의미를 알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잘못되었다.

 

이 대답은 명제가 하나의 사실을 말한다는 대답으로 연결되는데 크게 봐서 명제가 어떻게 뜻을 지닐 수 있는가에 대한 논거 중 하나다. 또 하나는 명제가 그림일 수 있다는 거다. 이 두가지 대답을 전개하기 위해 논고의 1, 2에서 존재론에 대해 해명한다.

위에서 보듯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적 구문론을 매우 엄격하게 전개시키는 데 이는 그의 철학에 대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함이다. 그에 의하면 철학은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이고 그 결과 명제들은 명료해진다.

그러므로 기존의 대부분의 철학적 물음들은 참/거짓의 문제가 아니고 그저 무의미한 것들이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대답도 없고 그저 무의미성을 확립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명료한 명제들은 자연 과학의 명제들이다(6.53).

이런 식으로 그는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명제는 뜻을 지닐 수 있는가, 왜 어떤 명제는 뜻 있는 명제와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뜻을 지니지 않는가, 왜 요소 명제의 진리 함수가 아닌 명제들은 뜻을 지니지 않는가 / 또한 이 명제들의 성격이 상이할 수 있다면 어떻게 상이한가에 대해 논고를 통해 전개해 나간다.

그리고나서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하듯"이라는 유명한 사다리 비유를 통해서 논고에서 제시한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경고한다(6.54).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득도했으니 여기 써있는 언어는 버려라 뭐 이런.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들이 결정되면 마찬가지로 말할 수 없는 것들이 결정된다. 그럼 그건 어떻게 해야 할까. 비트겐슈타인은 말해질 수 있는 건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될 수 없는 것에 관해서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이런 식으로 사고의 표현에 한계를 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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