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발바닥에서 뿌리가 나와 장승이 되겠다 싶어(사실 이게 그다지 나쁜 선택지는 아니지만), 점퍼와 모자를 챙기고 산책에 나선다. 날이 많이 풀렸다는 뉴스를 들었는데 생각처럼 따뜻하지는 않다. 너무 쉽게 생각하고 부실하게 옷을 챙긴 탓도 있다.
카메라를 챙겨서 나갔지만 차마 남의 삶의 일부에 렌즈를 가져다 댈 용기가 나지 않는다. 무생물과 자청해서 나선 자가 아니면 찍지를 못하니, 역시 사진가가 될 운명은 아니다. 터덜터덜 걷기 시작한다. 기록은 하지 못하지만 기억은 하자고 마음 먹는다.
개천과 슬래트 지붕, 합판 벽과 조악한 붉은 벽돌, 돌이 박혀있는 회색 시멘트들, 육중한 철제 대문과 이층 양옥집. 재래식 시장과 수도물을 사용했다고 광고하는 목욕탕. 한자로 적혀있는 미용실과 훌라후프가 걸려있는 문방구. 창문과 벽, 골목마다 먼지가 잔뜩 들어차 있는 게 예전과 다를 뿐이다.
길게 늘어선 시장과 신경질적인 트럭 운전수의 목소리가 서서히 뒤로 밀리더니 이윽고 거리는 좀 더 조용해 지고 잘려진 대리석 벽으로 장식된 이층 양옥집은 좀 더 거대해진다. 하지만 모든 것들은 이미 낡았다. 거대한 굴뚝이 서 있는 80년대 풍 아파트 단지를 지나 길 하나를 건너고 나니 입구에 차단기가 설치된 뉴타운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고, 공원을 지나 좀 더 걸어가니 롯데 캐슬이 보인다.
단 30분을 걸었는데 1960년대부터 2010년(은 아니고 평균적인 서울의 풍경을 고려하면 2000년 정도 쯤 되겠다)까지의 압축된 뷰가 펼쳐진다. 사람들을 데려다 서울 주거지 역사 투어를 시켜주고 싶을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하지만 여기도 재개발이 확정되었고 늦어도 3, 4년 안에 다 사라질 동네다. 나처럼 거처를 찾지 못했고 찾을 수도 없는 자들은 또 떠돌이가 되겠지.
어둑해지면서 다시 집에 들어온다. 배가 고프다. 괜히 움직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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