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16

20121016

옆집의 부인은 꽤 어려보인다. 필리핀에서 왔고 얼마 전 아이를 낳았다. 남편은 뭐 하는 사람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무슨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있을 것이다. 작은 단칸방이고, 무쏘가 한 대 있다. 여름엔 매우 덥고, 겨울엔 매우 춥다. 내가 있는 곳도 그러한데 구조상 아마 더 덥고, 더 추울 것이다. 옥상에는 필리핀 입맛에 맞는 몇 가지 허브를 기른다.

나와는 계단을 올라오다 마주치면 목례 정도 하는 사이다. 민방위 훈련장에서 우연히 만나 담배를 한 대 같이 피운 적은 있다.

이 집은 자주 싸운다. 때때로 남편이 폭력을 쓰는 거 같기도 하고, 때때로 부인이 크게 소리지르며 화를 내기도 한다. 단란한 가정에 시집 와 편하게 산다는 다른 친구들과 비교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남편이 성질이 급하고 짜증이 많은 성격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한 자리에 가만히 있다보면 이런 저런 일들을 알게 되는 법이다.

부인은 우는 아이를 안고 울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약간 어둑한 복도에서 그걸 눈치 채지 못하고 난 살짝 인사를 했다. 조금 지나고 옆 집에서 삑삑삑 하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곧이어 퉁퉁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또 한참을 지나 이번에는 우는 부인이 우는 아이를 안고 다시 계단을 올라왔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지만 문이 열리지 않나보다. 아마도 남편이 비밀번호를 바꿔놓고 나갔나 보다. 부인은 계속 운다. 아이도 계속 운다. 아이에게 화를 낸다. 문을 두드린다. 남편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늘 하루 절망하고, 괴롭고, 힘들었고, 포기했는데 바로 옆에 아마도 더 절망하고 더 괴로운 사람이 있다. 그런 이들은 어디서나 그러하듯 한 곳에 모여 살지만, 서로를 신경 쓸 틈도 남을 도와줄 힘도 없다. 일단은 옆 건물 할머니에게 데려다 주기라도 해야겠다. 방과 도로가 붙어있는 집에 사시는 할머니. 예전에 자전거를 잊어버렸다고 해서 잠시 도와드린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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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차, 평화,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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