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ㅎㅈㅇ군이 트위터에 큰 따옴표를 이용한 어처구니 없음의 표현을 했다. 여기서 큰 따옴표는 RT와 비슷하게 사용되었다. RT라는 건 꽤 재미있는데 동의나 공감 뿐만 아니라 단순 인용, 부정, 놀림, 비웃음 등등으로 사용된다. 그것이 무엇인가는 오직 RT한 자의 컨텍스트 안에서 이해되는데 사실 그것도 매번 명확하게 캐치되는 건 아니다.
이 RT된 문구는 또한 그것을 본 사람에게 그의 컨텍스트의 안에서 활용된다. 당연히 '어조'는 바뀔 수 있다. 구 RT의 경우에는 그것이 보다 드러나 있는데 신 RT의 경우엔 그렇지 않다. 어쨋든 RT한 자의 컨텍스트를 굳이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리가 없고, 그러므로 가끔 '이상한' 논쟁이 발생한다.
반박, 특히 인터넷스러운 강도높은 반박을 하면서 컨텍스트를 파악하지 않으려는 것은 역시 익명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조심하는 자만 손해보는 기분이 들게하는 치킨 게임과 비슷하다.
어쨋든 이 트윗 구경은 (거의) 아무도 (거의) 아무 것도 읽지 않는다라는 내 평소의 의심을 다시한 번 환기시킨다. 그리고 예전 유명했던 공간 논쟁도 떠오른다. ㅂㅂㄷㄹ의 공간 논쟁 원글은 못 찾았고, ㅃㅃ의 링크는 여기(클릭).
2. 또 하나 평소 의심 중에 하나는 코칭 스탭이 없는 독서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거니와 (혹시) 잘못되었을 지 모를 확신만 강화되는 일군의 부류들이 있다는 거다. 예를 들어 많은 경우 책 - 예를 들어 자본론, 국부론 또는 철학책 - 을 읽으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일치하는 부분을 찾아내고, 그럼으로 보다 큰 확신으로 나아가게 된다.
학부 때 독서 토론 같은 걸 해보면 아니 같은 걸 읽은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부분을 주목하는 경우가 흔히 발생한다. 소설책을 읽을 때도, 시집을 읽을 때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많은 부분 타인의 논리 혹은 진행과정 자체를 익히고, 즐기는 일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결국 행동 양식은 위의 RT를 받아들이는 것과 비슷하다.
이건 극단적인 예이지만 일반적으로도 그게 뭐든 자신의 상식, 지식 안에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그 레인지는 다르겠지만, 사실 양태는 비슷하다.
나 자신 역시 특별히 별 다를 게 없기 때문에 조심하려고는 하는데 그게 말처럼 되는 건 아니다. 오래간 만에 키틀러의 광학적 미디어라는 난도 높은 독서를 시작했는데 아, 이거 그냥 이렇게 읽으면 안되겠는데라는 생각이 문득 든 김에 하는 말.
우디 알렌은 철학 공부를 하려고 뉴욕대인가 학생에게 개인 교습을 받았다고 하던데 역시 이런 건 돈과 시간이 많이 든다. 그렇다면 오해를 짊어지는 건 평범한 소시민이 필연적으로 짊어질 경제적 판단 결과일 수도.
3. 바로 전 포스팅에서 피치포크 80년대 TOP 100 리스트를 참고하면서 그걸 좀 들어야지라고 생각했다고 해놓고 어제는 종일 James Blake를 들었다. 요즘은 한 장을 하루 종일 듣는 패턴을 선호한다. 나쁘진 않은데 폼을 너무 잡는다는 생각이 문득 들때면 조금 지루하다.
4. 요즘엔 이런 느낌이 나는 음악을 찾고 있다. 예시.
5. 아, 뭔 소리를 하는거야. 너무 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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