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22

참호에 갇힌 제1차 세계대전을 읽다

몇 번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존 엘리스라는 멘체스터 대학 군사학 교수로 있고, 주로 전쟁사를 연구하는 분이 썼다.

1. 요새 카게무샤도 그렇고 전쟁 관련된 이야기를 계속 접하고 있다. 나름 균형을 잡겠다는 목적도 있고, 요즘 기분이 이 정도로 답답한 게 아니면 잘 안 읽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세기말 아니 박툰말이기도 하고. 여하튼 13박툰인가가 끝나고 우리는 마야인들은 모르는 시공간에 접어 들었다.

2. 자려고 누웠다가 잠이 안와서 아이폰 블로거 앱을 들고 쓰고 있다. 쿼티 자판은 쓴 지 2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잘 못친다. 그리고 이 앱이 자꾸 쓴 걸 삼켜버려서 이것도 없어질까 싶다. 그렇게 사라진 글자들이 한 둘이 아니다.

3. 자, 이제 전쟁. 2차대전은 그래도 보고 들은 게 좀 있는데 1차대전은 잘 모른다. 1차대전의 한심한 점은 무기는 현대전인데 전술은 근대전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막 발명된 기관총을 앞에 두고 허허벌판 초원에서 돌격 앞으로~가 반복된다. 그걸 4년 쯤 했나보다.

카게무샤 마지막 장면을 보면 그런 게 나온다. 오다 노부나가의 군대가 방어막을 세우고 조총으로 지키고 있는데 다케다 신겐의 아들이 그 사지에 자기 군대를 밀어 넣고 결국 사람이고 말이고 다 죽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다 노부나가의 군대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아 전투에 참가한 인원 중 반은 살아 남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벨기에부터 쭉 아래로 길게 대치하고 있던 연합군과 독일군은 돌아가면서 다케다 신겐의 아들같은 짓을 한다. 기계는 정신을 이길 수 없다는 근대 군사학의 가르침 덕분이다. 이것은 어떤 점에서는 맞다.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틀리다. 그게 다라면 아마도 북한은 월드컵에서 우승했을 거다.

여하튼 존 엘리스는 이 전쟁을 전략, 보급, 후방, 전투, 후생 등으로 나눠 하나하나 분석한다. 들춰볼 수록 어이가 없는 현실 천지지만 그래도 이 전쟁은 역사적 사실이고, 목숨을 걸고 참전한 사람들이 부지기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여기서 쌓인 노하우와 반성이 2차대전에서 더 많은 사람을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인상적인 것 첫번째는 전투의 장소. 이 대치 지점은 하나같이 진흙밭이었다. 기관총에 맞서 참호를 파야했고, 그 안에서는 계속 물이 나왔다. 돌격 앞으로를 외치고 적진을 향해 뛰어가다 진흙늪에 빠져 죽은 사람도 널려있다.

군대 훈련하면서 바깥에서 며칠 만 지내도 온 사방에 불편한 게 천지인데 저런 전장에서 4년이 넘게 전쟁이 계속 되었다니 생각만 해도 갑갑하다. 그런 만큼 온갖 전염병 - 쥐, 이, 말똥, 시체, 파리가 만드는 - 이 번진 기록이 있다. 지저분한 환경이 수많은 환자를 양산했지만 의외로 전염병에 의한 사망률은 높지 않았다.

또 하나는 돌격 앞으로. 카게무샤에서 다케다 신겐의 군사와 같은 입장이다.

상상을 해보자. 적진과 우리 진지는 4~5km를 사이에 두고 참호 안에 매복 중이다. 양쪽 다 포와 기관총을 갖추고 있다. 이렇게 계속 대치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대치점 여기 저기에서 쉬지 않고 돌격 앞으로가 행해진다. 물론 가끔 적진을 빼앗기도 하고, 뺐기기도 한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다. 명령이 떨어지면 진흙 투성이에 폭탄이 만든 물구덩이와 거기 빠져 죽은 시체가 널려있는 평지를, 날아오는 폭탄과 기관총을 피해가며 4km를 뛰어가서 그걸 쏘고 있는 적을 잡아야 한다. 총과 대포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지금은 참호 아래다. 올라갈 준비를 하고 명령을 기다린다. 이게 끝나고 용케 살아 남으면 다음에 또 똑같은 걸 한다. 그렇게 4년.

명령을 기다리며 과연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집? 가족? 살아야 겠다는 욕구? 적을 무찌르겠다는 다짐?

이 부분에 대해 꽤 많은 연구가 있었는데 결론적으로는 다들 거의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고, 가장 가까운 건 적을 무찌르겠다는 일종의 전우애다.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죽는 거야 뭐, 라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옆에 있는 놈도 뛰는데 같이 가자 같은 전우애도 함께 발생한다.

긴장감은 참호 아래에서 대기할 때 극도에 달하다가 막상 올라가면 풀린다고 한다. 혼란의 와중에 쉼없이 여러가지 판단(생사가 오고 가는)을 하다보면 흥분하게 되고, 그러므로 긴장이 약해진다.

그리고 전투가 끝나면 무슨 생각이 들까. 신에게의 감사 기도? 아니면 가족들에게 안위를 전할 역심? 그것도 아니다. 대부분은 부족한 잠을 자든가, 배고파서 밥을 먹었다고 한다.

훨씬 낮은 강도의 스트레스겠지만 군대 가기 전 궁금했던 것 중 하나가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내가 어떻게 되려나 하는 점이었다. 결론은 적어도 내 자신은 일차적인 욕구, 즉 졸림과 배고픔에 끊임없는 지배를 받았다. 거의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고 뭔가 보고 싶다거나, 어디 가고 싶다거나 하는 것도 사라졌다. 여자를 중심으로 한 사람에 관련된 것도 한창 힘들 때는 거의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자고, 먹고 싶을 뿐.

결국 본능은 일단 제 몸 사는 게 먼저고, 그 다음은 번식이고, 그 다음에 가서야 조금 더 복잡한 즐거움이군 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1차대전 참전 병사들의 행동 패턴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저런 게 극대화된 상태다. 무아의 지경은 저렇게 찾아온다. 그러고 보니 인도에서 부처가 되겠다고 갖은 방식으로 제 몸을 박해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4. 내세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죽음을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죽음을 인식해야하는 기관이 죽기 때문이다. 벌판을 뛰어가고 있다가 옆에 폭탄이 떨어지는 걸 보고, 쾅 소리가 들리고(들릴까?), 그 다음은 무다. 즉 아마도 그는 자기가 죽은 걸 모를 것이다.

따지고 보면 늙고 병들어 죽는 때도 마찬가지다. 아프다, 힘들다 하다가 무. 총에 맞아 죽는 것도, 텔 아비브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폭탄이
터지는 것도, 맨하탄을 걷다가 고층 건물에
비행기가 와서 박히는 것도, 사고로 죽는 것도 그렇다. 교수형을 당하는 사람은 유일하게 자기가 언제 죽는 지 정확한 날짜을 아는 사람이지만 그 역시 죽는 순간은 아마 캐치하지 못할 거다.

또 군 이야기를 하자면(전쟁 관련된 걸 많이 보고 있다니까...) 잘못 터진 크레모어에 팔을 잃은 사람의 이야기를 의무병이었던 후배에게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있던 부대는 아니었고.

여튼 위력 시범을 보이는 거였는데 시범탄이 터지지 않았고, 왜 저러냐 하고 병사 한 명이 다가가는 동안에 터졌다고 한다.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 그 병사는 뛰어가다가 갑자기 너무 졸려서 누워서 잤다고 한다. 폭발-팔이 사라짐/큰 출혈-졸림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잠에서 깨어난 다음엔 거대한 고통이 찾아왔겠지만 죽은 사람들은 그 부분이 없다. 졸리네 하고 끝이다.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들은 아마 굉장한 아픔에 시달리다 어느 순간 끝날 거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총상에 내장이 빠져나왔던 병사가 그런 식으로 죽었다. 이 책에 보면 부상당한 배를 꼭 붙잡고 병원에 와서 팔을 내렸더니 장이 쏟아지더라 하는 실화도 있었다.

다 떠나서 죽는 순간을 본인이 눈치채지 못한다는 건 그래도 나름 괜찮은 거 같기도 하다. 아이폰으로 쓴 거라 순서 등이 엉망이지만 대충 읽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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