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긴데 제목 그대로다.
예를 들어 정치. 정치는 심리적인 움직임이다. 바보같은 사람이 당선되는 경우도 있고, 왜 안될까 싶은 사람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이익만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인기만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은 복합적이고 미묘한 기류를 타고 움직인다. 그래서 어렵다. 하지만 재미있고, 예측대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움직인다.
민노당이 지루하지만 아마도 옳은 부분이 많은 공약을 자꾸 내세우지만 실패하는 건 이런 이유가 아닌가 생각한다. 당선이 토론으로 결정된 다면, 혹은 투표를 하러 가는 사람들이 무척 진지하다면, 그쪽이 많이 당선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그런 건, 나이가 먹으면 더 현명해지니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을 대표로 세우자 혹은 일률적 IQ 검사를 통해 가장 높은 사람을 서울대 교수를 시키자라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쓸모없는 예상이다.
스타쉽 트루퍼스였나, 거기서는 무슨 검사만 하면 얘는 어디로 가서 뭘 하라고 결정이 된다. 같이 처음 훈련을 받지만 거기서 누구는 전쟁을 지휘하는 고급 장교가 되고, 누구는 최전방에서 총을 들고 뛰어다니며 괴물과 싸우는 보병이 된다.
혹시 미래에는 이렇게 될 지도 모른다. 인간 복제가 성행하면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광부, 누구는 태어날 때 부터 군인,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교수로 점지어 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쨋든.
학자들이 엄밀한 논리로 이론을 전개한다. 과학 쪽 같은 아마도 달라지지 않을 논리의 결과물들도 있다. 그걸 실현하기 위해서는 돈이 들고, 정치가 개입된다. 옳다고 승리하는 건 아니다. 틀리다고 실패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게 어딨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몇 천년 동안 인간이 다 죽지 않고 균형을 이뤄내는 방법이다. 나라마다 룰이 조금씩 다르지만, 어쨋든 그런게 있다.
경제학도 마찬가지다. 경제학은, 언젠가부터, 사회 과학 쪽에서 수학이나 물리학의 자리를 점유하려고 한다. 수학과 물리학을 몽땅 들고와서 세상에 대입시킨다. 이런 게 옳을 리가 없다. 누구는 우유가 먹고 싶고, 누구는 콜라가 먹고 싶다. 사람이 이득만 생각한다면 담배나 술 따위가 세상에 단 한개라도 팔릴 리가 없다. 그렇지만 무지하게 잘 팔린다.
그렇지만 논리 싸움, 정책을 두고 벌어지는 토론에서는 언제나 이긴다. 무조건 맞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경제 학자들이 논리의 스트럭쳐를 제공하고, 정치인들이 거기서 쓸만한 것들을 뽑고, 그걸 괜찮다고 생각하는 시민들이 그런 정치인에게 투표하는 고리가 무너져버렸다는 점이다. 즉, 경제학자들이 행정학 등을 등에 업고 현실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게 엉망이 되고 있다.
더 옳은 지는 몰라도, 더 팍팍하다. 능력이 안되지만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용납이 되지 않고, 능력이 되지만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이 용납이 되지 못한다. 어쩌면, 스타쉽 트루퍼스에 나오는 세상 정도가 엄밀한 고전 경제학자들이 원하는 세상일 지도 모른다. 과연 그렇게 된다면 검사에 의해 그들이 교수감이 아니라는 판결이 나온다면 자리를 내 놓을까?
케인지안의 재미있는 점은 그 부분을 은연 중에 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사람이 하는 일이다, 라는 게 전제 어딘가에 깔려있다. 요새는 클래시컬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런 패기있는 주장을 하는 케인지언들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게 아쉽기는 하다. 여하튼 이런 주장은 인간이 보다 개입하고, 그러므로 부정의 소지가 있다는 게 문제다.
이건 가만히 두면 보통의 경우 점점 더 커지고, 감시하자면 감시의 조직과 담합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 안그러면 이번 금감원 사태 같은 게 일어난다 - 역시 감시 부분이 점점 더 커진다.
정답은, 아마도 답이 없다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경제학과 대학생들의 시험은 체점이 가능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복잡하게 문제를 끌고 가지 않는다. 그런 점도 고전학파가 더 인기인 요인이 아닌가 싶다. 경제학을 엄밀한 수리학으로 몰고 갈 수록, 교수의 입지가 더 견고해지고, 더 확실해지고, 타 학문과의 괴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런 건 답이 안나오는 것 가지고 토론을 하는 문화의 비 효용성에 대한 안티 테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치가 없는 토론이란 건 별로 없다. 지리한 과정이 반복되고, 합의를 위해 그걸 봉합하는 발란스를 찾아내는 노력을 계속 하다보면, 요령이 생긴다. 내 경험에 의하자면 이런 봉합의 발란스는 '지나친' 토론 말고는 방법이 없다.
질려버릴 때 까지 떠들며 싸워대야, 그제서야 이렇게는 안되겠으니 타협을 좀 해보자는 말이 나온다. 책으로 배워서는 절대 이런 방법을 몸에 못 익힌다. 그런데 요새는 경제학을 책으로 배우니, 이런 봉합의 기술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지고, '더 옳은 것'을 밀어부치는 기술만 발전한다. 더불어 '덜 옳은 것'을 밀어버리는 기술도 발전한다.
확실히 민주주의의 경험이 오래된 나라들이 이런 룰을 어렸을 때 터득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깨닫고 있(었)다. 요새는 그런 거 같지도 않다. 미국처럼 역사가 짧은, 그리고 타국과의 토론이 별로 필요없는 힘을 가지게 된 나라가 득세해서 그런게 아닌가 싶다.
뭐 이런 생각을 잠깐 했다. 여기는 발전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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