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502

지루한 취향

야구를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소위 말하는 투수전을 좋아한다. 절정의 기량으로 공을 던지고, 훌륭한 타자들이 그걸 때려내기 위해 분투한 흔적들, 그리고 완벽한 내야의 수비진이 그걸 막기 위해 애쓰는 걸 좋아한다는 뜻이다.

물론이지만 어영부영하며 점수 못내고 흘러가는 걸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다. 말하자면 긴장이 넘치는 0의 행진을 좋아한다. 점수는 8회 이전에 1점, 혹은 2점 정도 나는 게 좋다. 그래야 마무리 투수가 등장한다. 그라운드 위와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온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있는 마무리 투수야 말로 야구라는 경기의 정점이다.

그런 점에서 홈런 한 두방으로, 실책 한 두개로 경기 흐름이 뒤바뀌어 버리는 경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당연히 실제로는 이런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

어쨋든 이런 완벽한 투수전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페넌트레이스라는 건 길고도 지루하면서도 컨디션을 조절해야 하는 거대한 여정이다. 우승을 하고자 하는 팀이 매 경기 이렇게 자신을 불태우면 9월도 되기 전에 제 풀에 꼬꾸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경기는 더 가치있다. (내가 응원하는 메츠는 혹시나 기회가 와도 이런 경기를 펼칠 형편이 요즘은 못된다)

 

축구도 비슷하다. 정교한 패스와 유기적인 움직임으로 한 점을 만들어내기 위해 쌓여나가는 과정을 보는 게 재미있고, 또 그걸 막아내는 게 재미있다. 한 5년 전쯤 아스날이 보여줬던 이 과정들은 정말 훌륭했다. 하지만 요즘은 꽤 한심하다. 이태리 대표팀도 좋아한다. 완벽한 카테나치오라는 건 정말로 훌륭하다.

물론 어부지리로 우연히 1점 만들어 놓고 그걸 막으려고 하는 카테나치오는 형편없이 지루하다. 그런 점에서 이태리 프로팀끼리 하는 경기가 확실히 재미있다. 그야말로 차곡차곡 쌓이며 필연을 만들어간다. 그 형편없는 인종주의자 말종 인간들이 그런 경기를 만드는 모습은 실로 경이롭다.

하지만 카테나치오만 가지고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시대는 분명히 지나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프로 리그의 축구라는 건 평범한 인간은 절대 할 수 없는 종류가 되어가게 될 것이다.

 

음악을 들을 때 주로 드럼과 베이스를 쫓아간다. 이 둘에 집중해 듣고 있다보면 멜로디를 담당하는 나머지들이 서서히 쌓여간다. 리듬 라인은 스쳐 들으면 똑같은 거 같지만, 개념있는 프로가 만들었다면 쉴 새 없이 늘어지고, 뭉쳐지고, 흩어지고, 다시 모이는 과정을 거친다. 그 위에 사운드스케이프가 층층이 겹쳐진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내가 음악을 감상하는 데 있어 멜로디라는 건 그렇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취향 상 멜로디를 중심으로 듣고 있다보면 금방 질려 버린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드럼과 베이스 라인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매번 들어도 질리지 않는 리듬 라인을 만들어내는 곡이 좋다.

어쨋든 이런 음악 감상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보컬에 대해 그다지 관대하지 못하다. 예를 들어 U2 음악의 가장 큰 적은 언제나 보노라고 생각해 왔다. 명백히 기계적인 느낌의 연주 위에 너무나 인간적인 목소리가 깔려있다. 이에 비해 펫샵 보이스 같은 경우에는 무척 훌륭하다.

퀸의 경우에는 조금 특이하다.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는 언뜻 감정적이지만, 또한 기계적이다. 그 발란스가 굉장히 좋다. 더구나 나머지 멤버들의 연주도 그 발란스를 함께 만들어간다. 이런 독특한 목소리가 섞여 있는데도 전혀 이질감이 안 느껴진다.

 

그러던 와중에 나가수를 보면서 보컬에 이런 재미가 있구나 하는 걸 조금, 아주 조금 깨닫고 있다. 사실 이 이야기를 이미 몇 번 쓴 적 있다. 여하튼 노래라는 건 너무나 감정적이라 조금 무섭다. 상대의 감정을 악기라는 도구를 거치지 않고 직접 맞닥드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여전히 내 취향은 기계적인 연주가, 내게 극적인 감정을 만들어내는 거다. 즉 감정은 음악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그걸 들은 내가 만들어내는 거다. 강요당하는 거 같은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이 그토록 보컬을, 노래를 좋아하는 지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나의 지루하고 지리한 취향이 이번에도 주목하는 건, 하일라이트에 가기까지 가수가 서서히 접근하는 방법이다. 필연성을 획득하는 방법. 어차피 훌륭한 가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절정의 부분은 훌륭하게 소화해 낼 수 있다. 문제는 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다. 이게 참 사람마다 다르다.

박정현의 경우에는 무척 흥미롭다. 그의 노래는 마치 드라마를 보는 거 같다. 3분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시작이 있고, 사건이 쌓이고, 폭발하고, 정리된다. 그의 표정에, 목소리에, 노래에 기승전결이 확고하게 박혀있다. 그래서 이야기가 무척이나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는다. 드라마틱하다.

이소라의 경우에는 약간 다르다. 사건이 있고, 그게 지나가고, 지나간 감정들이 응축되어 가슴 깊숙하게 쌓인다. 그 상황에서 그걸 끄집어 낸다. 그리고 그걸 그대로 들려준다. 이야기를 전달해 주는 게 아니라 그냥 이야기가 남긴 감정 그 자체다. 이런 건, 잘은 몰라도, 이소라의 정신 건강에 매우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감정을 너무 소모한다.

이소라는 예전에 청혼을 부르던 시절과 비교하면 목소리가 훨씬 가늘어졌다. 그리고 훨씬 디테일이 살아 났다. 좀 더 차분해 지고, 좀 더 절제한다. 그러면서 그 뒤에 숨겨진 복잡하고 거대한 감정의 존재를 청자가 느끼게 만든다. 예전보다 훨씬 더 굉장한 가수가 되어가는 거 같다. 더구나 그게 아직 진행중이다.

어제 김연우의 노래는, 예전에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있는데 능숙한 서커스를 보는 거 같았다. 아니면 기름칠이 잘 된 좋은 기계. 굉장히 어려울 거 같은 걸, 굉장히 쉽게 해낸다. 기술 점수 만점. 짝짝짝. 그렇지만 어제는 긴장을 한 건지 얼굴이 너무 경직되어 있었다. 얼마 전 비틀즈 코드에 나왔을 때 얼굴과 너무 다르다.

덕분에 이성과 감정 사이의 갭이 두드러졌다. 이건 무대가 익숙해지면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가수라는 방송의 컨셉 상 '사랑한다는 흔한 말'을 불렀다면 훨씬 더 파괴력이 있었을거 같다. 길게 보고 아껴뒀을 수도 있다.

김범수는 오직 하일라이트를 위해서만 노래가 존재하는 것 처럼 보였다. 많이 불안했고, 듣는 사람 입장에서도 많이 불안했다. 하지만 어제 꼴찌는 큰 약이 되지 않을까 싶다. 타이밍이 아주 좋다.

임재범은, 사실 나는 임재범의 보컬을 좋아하지 않는다. 시나위 때도 좋아하지 않았다. 이 사람은 위에서 예를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이소라와 비슷한 스타일이다. 하지만 그걸 넘어서, 그냥 감정 그 자체를 덩어리 채 확 펼쳐 버린다. 너무나 개인적이고 너무나 감정적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다 합쳐져 결론적으론 모든 걸 압도해 버린다.

사실 음표상으로 본다면 어제 많이 틀렸다. 하지만 그런 거 따위 알게 뭐냐라는 게 그의 노래에는 존재한다. 그리고 듣는 사람도 그런 거 따위 알게 뭐냐라는 세상에 빠지게 된다. 음악을 목소리로 지배해 버리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에, 솔직히 이런 건 무섭고 버겁다. 그래서 내가 잘 못 듣는다.

UV(유세윤과 뮤지의 UV)가 얼마 전에 정엽의 라디오에 나왔는데 정엽이 브아솔의 음악에 대한 평가를 물었을 때, 악보에 도가 적혀있다고 꼭 도를 불러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그리고 없는 감정을 일부러 만들려고 하지 마, 뭐 이런 농담을 했다.

임재범의 노래를 듣고 있다보니 그 이야기 생각이 났다. UV는 폼나고 재밌으라고 한 이야기겠지만, 임재범은 그걸 실현하고 있다.

이건 사실 음악이지만 음악이 아니다. 명징하게 표현하기가 조금 어려운데, 어쨋든 뭔가 다른 종류다. 그렇다면 이런 게 과연 '노래'라는 걸까? 이런 게 즐거운가? 이소라의 노래는 이야기 그 자체이지만 여전히 음악의 즐거움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쪽은 공감, 혹은 비공감이 있다. 가는 길이 다르다. 부르기도 힘들겠지만, 듣기도 힘들지 않나? 그렇게까지 음악에 지배당하고 싶지는 않다. 어쨋든 이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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