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523

21일 오후 2시, 20도

5월 20일은 비가 내렸다. 타다닥 거리는 굵은 비부터, 비가 오는 지 안오는 지 알 수 없었으나 몸이 스르륵 젖어드는 안개비, 아주 잠깐 구름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 등등 변덕스럽기 그지 없는 날씨였다. 그리고 너무 추웠다. 바람은 안 불었지만 몸 곳곳에 한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5월에 이렇게 추운 날이 있었던가.. 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21일은 더웠다. 비는 그쳤고, 아침 공기는 상쾌했다. 맑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어제 비 덕분에 가시 거리 안의 초록은 선명했다. 탄천을 걷기로 했지만 오늘 입은 옷은 너무 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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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에서 나온 트랙탑 앞에 써있는 유벤투스는 옷을 구입할 당시에는 커다란 별 두개에 빛나는 명문 구단이었지만, 그 사이에 승부 부정 파문, 2부 리그로 강등, 벌금때문에 그리고 2부로 떨어진 구단 때문에 떠나는 주전 선수들로 엉망이 되었다가 다시 1부 리그로 승격해 4, 5위에서 헤매는 시절까지의 역사가 있었다. 즉, 오래된 옷이다.

이 옷은 약간 두툼해, 20일 날씨에는 춥고 21일 날씨에는 덥다. 이 정도 두께의 옷은 이제 한국의 날씨에서는 입을 타이밍을 찾기가 무척 어려워졌다. 정직하게 이 옷이 적당하게 사용 될 시즌은, 아무리 생각해도 1년 중 70시간 안팎이다.

어쨋든 이 두터움과 검정 빛깔은 5월, 오후 2시 20도의 햇빛을 잔뜩 빨아들였고 나는 2km로 걷고 난 후 지쳐 떨어졌다. 뱃속도 엉망이었다.

그저께는 고기 국수와 만두를 배가 터지기 직전까지 잔뜩 쳐먹고, 뱃 속에서 불어나는 압력을 견디며 블루베리 요거트라는 걸 마셨다가 뒤집어졌다. 그리고 오늘은 빈 속에 매운 풋고추를 먹으면서 와, 이거 맵네를 연신 외치며 계속 쳐먹은 다음, 차곡 차곡 모은 커피빈 쿠폰으로 얼티밋 아이스 블렌디드인가 뭔가를 벌컥벌컥 마시고, 탄천 햇빛 아래서 더위에 달궈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식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햇빛은 뜨거웠지만 그래도 강변가에서 아른거리는 풀 냄새는 너무 좋았다. 봄에 여행을 떠나 외지고 숲으로 둘러싸인 종착지에 도착해 문을 딱 열었을 때 나는 냄새. 배 아픔과 살짝 먹어버린 더위에 정신이 반쯤 나가있으면서도 냄새가 참 좋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후배 집 침대에서 선풍기 바람을 쐬며 뒹굴거리다가 저녁에는 나가수를 봤다. 배가 아파서 이소라는 못봤고, 주르륵 지나가고, 임재범을 봤다.

박정현과 김범수가 하위권일거라 생각했고, 그러면 저번주와 통합해 4, 5, 6위 선을 왔다 갔다 할 YB, 김연우, BMK가 위험할 거라 생각했고, BMK는 선곡운이 아주 좋았기 때문에 결국은 YB와 김연우가 각축전을 벌일 거라 생각을 했다. 정답은 김연우였다. 상당히 어려운 퀴즈다. 김범수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3등이었다.

두번 경연에서 YB는 5등과 5등, 김연우는 6등과 4등을 했다. 7위가 상위권으로 튀어올라가 버리면 7위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도 7위를 하게 된다. 합산의 묘미이기도 하고, 합산의 모순이기도 하다. 이러면 이소라가 초기에 말했던 꾸준한 5위나 6위로 버티는 전략은 위험해 진다. (아마도) 그걸 알았기 때문에 넘버 원을 했고, 그걸 하다가 약간 지쳐버렸다.

임재범이 감동을 주는 이유가 진정성 때문이다라는 트윗글을 봤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소라도, 박정현도, 김범수도, 김연우도 진정으로 노래를 부른다. 당연히 구석구석까지 삶이 담겨있다. 김연우의 경우는 그의 말대로 다만 고단한 시련이 많이 담겨져 있지 않을 뿐이다.

이 게임은 그러므로 매우 전략적이다. 두 경연의 합산이 되면서 더욱 그렇게 되었다. 다만 그 전략이 책상 앞에서 짜낸 게 아니라, 오랜 가수 생활과 무대에서의 관중과의 경험 축적이라는 본능이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임재범은 아주 좋았다. 내가 아주 싫어하는 방식을 - 문화 예술 활동에서 감정을 솔직하게 표면에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 그걸 뛰어넘어서 해낸다.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임재범이 주는 감동의 좀 더 명확한 정체는,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

 

그리고 11시 42분에 출발하는 공휴일 마지막 지하철을 타고 집에 들어왔다. 고단한 하루다. 하지만 한 건 거의 없다. 먹었고, 잤고, TV를 봤고, 누워 있었다. 몬스터에서 요한이 외치던 hilfe mir, hilfe mir라는 문구가 자꾸 머리를 떠돈다. 하지만 오늘 만난 내 후배와 마찬가지로, 손을 벌릴 곳은 없다. 점점 사라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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