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08

crawl

서랍장을 뒤져 입고 싶지 않은 속옷을 꺼내 입는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 신고 싶지 않은 양말, 입고 싶지 않은 스웨터, 입고 싶지 얺은 바지, 입고 싶지 않은 코트에, 두르고 싶지 않은 머플러를 보기 싫은 방식으로 굴둘 동여 맨다. 맡고 싶지 않은 향수를 뿌리고 뿌연 거리로 나온다. 이제 곧 보기도 싫은 해가 뜨겠지만 지긋지긋한 구름이 그걸 가려주겠지. 눈이 살짝 내린다. 신문지같은 하늘이다. 그러고보니 신문지 냄새도 나는 거 같다. 공기는 차갑다. 숨을 쉴 때마다 머리 속이 맑아진다. 몸이 떨린다. 입술 튼 곳이 살며시 쓰리다. 어제 밤에 삼년, 혹은 사년 쯤 묵은 보호제를 발랐는데 별로 효과가 없었나보다. 멀리서 소주의 알콜 냄새가 난다. 웹을 뒤적거리며 눈을 기다리는 이야기들을 듣는다. 눈을 혐오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아래가 더럽든, 깨끗하든, 아름답든, 신비롭든, 구역질나든, 부조리하든 눈은 다 덮어 버린다. 위력적이고, 그것만으로도 칭송받을 자격이 있다. 부재중 전화에 찍힌 이름들을 본다.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거부당한 사람들의 이름을 본다. 머리를 마주하고 쓸데없이 함께 시간을 축낸 이들의 이름을 본다. 노새, 노루, 프랑스시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아, 이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말레이 곰은 대체 어디에 가 있을까. 손이 더러우니 마음이 차분해 지지가 않는다. 꾸역꾸역 밥을 먹으며 자기혐오의 수치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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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 음색,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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