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겨옴
2시간쯤 잤나. 별일은 아니었다. 그냥 usb 연장선을 떼어다가 다른 곳에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하드디스크 3개가 사라졌다고 나오고, 있지도 않은 디스켓 쓰는 드라이브를 찾아대고, CMOS가 초기화 되었다. 팔짱을 끼고 앉아 대화를 시도했지만 무산되었고, 결국 소동은 진압되었다. 갈등이 청산된 게 아니므로 미래는 알 수 없다. 내 조막만한 방에서도 이렇게 태엽이 삐걱대는데 세상이 온전히 유지되고 있는 걸 보면 참 신통하다.
그러면서 노래를 들었다. 브로콜리 너마저를 들었고, 데프콘을 들었고, 라이드의 오래전 음반을 들었다. 조세희는 음식에 추억을 가지지 마라고 소설에다 썼었다. 내가 덧붙인다면 음악에도 추억을 가지지 말 것. 장소에도 추억을 가지지 말 것. 갑자기 생각나는데 예전에 누구였지, 장정일이었나 하일지였나, 혹은 다른 누구의 소설에 어떤 연인이 남자의 집에서 동거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침대 위에서만 관계를 가졌는데 날이 갈수록 화장실, 소파, 테이블, 싱크대로 장소가 확대되어 갔다. 결국 남자는 어디를 봐도 음란한 추억만 서려있는 방 한가운데 남게 되었다. 그러므로 일찌감치 장소를 한정시켜라 뭐 이런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뭐든 대비하는 삶은 부럽운 점도 있기는 한데 잘 못한다. 아무렴 어때 싶기도 하고.
그리고 마침 동생에게 DSLR 빌려놓은게 있어서 새벽에 화장실에서, 옥상에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원래 이 글의 주인공이 될 뻔 했으나 너무 보잘것없어 모두 예선에서 탈락했다. 오늘의 공모전, 당선작 없음. 나이가 먹었다고 현명해지지 못하듯이 기계가 좋다고 훌륭한 게 나오진 않는다. 마찬가지로 목소리 좋고 노래 좀 잘한다고 멋진 음악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에게 통치를 맡기고, 노래를 제일 잘 부르는 사람만 음반을 내게 했으면 세상은 일률적이긴 해도 훨씬 편해졌을 것이다. 한 줄로 세우는 경쟁이면 여건이 조금이라도 나은 자가 결국은 거의 이긴다. 대부분은 이런 식이긴게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분야에서는 아니다. 그렇게 쉽게 돌아가진 않는다. 그래서 열악한 구석이 조금 있다면 아이디어를 총동원하고, 이를 통해 세상에 없던 게 나온다. 돈이 하나도 없는 고등학생이나 대학교 초년생들이 멋 좀 내보겠다고 동대문과 방산 시장을 훑고 다니면, 비록 과정을 구질구질할 지라도 뭔가 새로운 게 나오는 법이다.
물론 피곤한 것과 실패의 가능성은 덤으로 따라 다닌다. 실패의 가능성이라는 건 무섭다. 예전에 가수 김모씨가 어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나와서 예전에 집이 없어서 아파트 옥상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개그맨 김모씨가 설마 구할라면 집을 못 구했겠냐고, 뭐 이유가 따로 있어서 그렇게 살았던 거 아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가수 김모씨가 정말 그 때는 구하고 싶어도 불가능했다는 답을 했다. 아무 것도 없다는 건 그런 것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따위의 말은 그래서 무섭다. 어떻게도 안되는 경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밥이라도 한 술 줄게 아니면 그런 말은 입에 안올리는게 좋다. 여하튼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빼내려다 보니 한번 발을 잘못 디디면 돌이킬 수가 없다.
DSLR 하니 또 생각나는데, 며칠 전 DSLR을 빌리던 날, 갑자기 2일 후에 들고오라는 통보를 받았고, 결국 생쇼를 했다. 백팩과 카메라와 노트북을 들고 성북구, 송파구, 서초구, 서대문구를 뽈뽈거리면 돌아다녔고, 다음 날에는 성북구, 서초구, 중구, 마포구, 서대문구를 돌아다녔다. 한심한 건 이틀간 노트북은 한 번도 켜지 않았다. 4시간은 지하철 코인 락커에 넣어놨는데 4시간에 2천원이나 하는 지는 몰랐다.
뭐 하나 남는 것도 없이. 여기서 남는 것도 없다 하면 정말 남는 것도 없다 함이다. 그 어떤 것도. 기억을 되살려보면 내 인생 전반이 이렇게 온 몸의 힘을 빼가며 열심히 걷고 결국 남는 건 배고픔 정도인게 아닌가 싶다. 어쨋든 발가락이 여전히 좀 아프지만, 그날은 이미 지나갔다.
오늘은 오랜 만에 학교에 와 있다. 내가 밥을 주던 고양이 가족은 이사를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천하장사 소시지도 하나 챙겨왔는데 안타깝다. 오래된 노트북은 팬 소리도 우렁차고, 터치패드 클릭 소리도 우렁차고, 키보드 소리도 우렁차다. 모르긴 해도 반경 5km 이내에 실사용 중인 노트북 중에 성능은 제일 떨어질 게 틀림없는 주제에(펜티엄 모바일 2GHz에 램 380M, 하드는 20G다), 실로 요란하다. 페라리와 마세라티를 제외한, 이 둘도 모르는 척하고 있지만 발을 조금은 들여놓고 있는 거 같기는 한데, 이태리 자동차 같다.
그래도 어제 노트북을 애써서 쓰기 좋게 정돈해 놔서 그런지 나쁘진 않다. 근사한 레이아웃과 폰트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
그리고 여기 이렇게 앉아, 지하철에서 전화기로 에버노트에 반쯤 쓴 메모에다 나머지를 붙이고 있다. 뭘 좀 써볼까 하고 재밌는 생각을 많이 했던 거 같은데 밥 먹으면서 다 잊어버렸다. 그리곤 문장 하나하나에, 글자 하나하나에 심드렁한 우유부단함과 우울함이 먼지처럼 달라 붙는다. 데프콘이 우울한 이야기만 안하면 연애는 계속 성공이라고 가사에다 썼었는데 몇 년째 우울한 이야기밖에 없다. 잘 모르지만 사실 데프콘도 그렇게 연애 잘 할 것 같은 아우라를 가지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만…
탈락한 사진들, 부질없던 발걸음들, 지나쳐버린 음악과 소리들, 머리 속을 떠도는 예전에 읽었던 소설과 수필의 문장들, 아련히 보이는 듯한 영화들, 사진들을 생각한다. 그러고보니 수면의 과학을 보겠다고 몇 주째 벼르고 있는데 못보고 있다. 이렇게 여전히 나는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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