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C의 도깨비 음방을 보다가 몇 가지 생각이 든 김에 여기에 써 본다. 이야기를 약간 먼 데서 시작해야 하는데...
우선 싱어송라이터의 우월성에 대해서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자기가 자기 이야기를 한다고 그게 장점이 되는 건 아니다. 어떤 뮤지션이, 아티스트가, 아이돌이 정규 앨범이든 미니 앨범이든 디지털 싱글이든 뭔가 취사 선택을 하는 게 이미 자신의 이야기다. 겪어봤던 겪어보지 않았던 그런 건 상관이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직접적 경험은 오히려 사고의 폭을 더 좁게 만들 수도 있다.
메시지 전달의 측면에서만 봐도 한 명이 아무리 많은 경험을 하고 그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 봤다고 해도 두 명이 있는 쪽이 당연히 더 크다. 셀렉션에 의해 이야기의 구조를 완성하는 쪽에 보다 더 큰 이야기가 담길 수도 있다.
우리가 듣고자 하는 건 딱 저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이야기다. 그거면 된다. 더구나 괜한 정보 따위 알고 싶지 않고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도 알고 싶지 않다. 생각은 내가 하는 거고 또 다들 각자 알아서 하는 거다.
여튼 그러므로 꼭 자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연기에 의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겪어본 건 겪어본 대로, 상상한 건 상상한 대로 그런 게 만들어지고 보고 듣는 사람들은 그 모습과 차이를 보며 뭔가 새로운 것들을 - 감상이라고 하는 - 만들어 낸다.
이런 측면에서 자기 이야기처럼 연기를 하면 된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사실 굳이 자기 이야기처럼 할 필요마저 있을까 싶다. 자기 이야기처럼 연기를 하는 건 물론 보고 듣는 사람의 감정적 몰입을 유도해 내기 위해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감정적 몰입 만이 감상의 전부가 아니다. 동감할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다. 그렇구나... 가지고도 충분히 여러가지 생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결국 각자의 방식을 각자가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다.
CLC를 보다가 이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물론 최유진 파트 때문이다. 이 그룹은 원래 크리스탈 클리어~라는 구호 답게 순수, 청순 콘셉트로 데뷔를 했지만 수많은 걸 그룹의 난립 속에서 돌파구를 찾다가 포미닛이 있었고 지금은 현아가 있는 큐브가 제일 잘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다 보니 몇 가지 문제가 생겼는데 그 핵심에 있는 게 바로 유진이다.
화장이나 안무가 상당히 쎈 콘셉트고(이에 비해 가사는 넌 왜 날 몰라주냐 날 좀 데려가라에 머물고 있다) 다들 잡아먹을 듯한 포즈를 하고 있는 데 그런 와중에 도깨비 머리를 한 유진은 정통 아이돌 표정을 하고 살짝 튀어나왔다가 들어간다. 음방을 보면 심지어 자기 파트에 뒤에서 튀어나오며 곡과 안무와 가사에 그닥 어울리지 않게 전통적 아이돌의 표정으로 방긋 방긋 웃기까지 한다. 뭐 이게 이 곡과 불균형을 만드는 건 맞는데, 바로 이 안 어울림 덕분에 이 곡은 CLC 만의 노래가 된다고 볼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멍하니 노래를 틀어 놓고 있다가 어 이거 뭐지 하고 되돌아 보는 부분은 노래 실력, 연기력 뭐 이런 것과 큰 상관이 없다. 특히 여럿이 부르는 곡 안에서 묻히지 않는 건, 곡 안에서 자기 영역을 만들어 내면서 전체의 큰 그림을 만들어 내는 건 프로듀싱과 멤버 각자의 몫이고 능력이다.
IOI의 목소리는 유연정 빼고 거의 모르는데(우주소녀에서 열심히 소리를 질러대니까 금방 알 수 있다) 이번에 나온 소나기를 들으면서 비슷비슷한 톤과 목소리가 우중충하게 지나가는 와중에 이게 누구지 하고 찾아보게 된 부분은 1분 30초 쯤에 나오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소나기죠 그런 감정이죠' 부분이었다. 알고 보니 소혜 파트였다. 발음도 안 좋고 음도 거의 움직이지 않고 한 마디로 말하자면 웅얼웅얼 거리며 지나가고(케이팝 스타였으면 1차 예선에서 떨어질 거 같다) 딱 이거 한 줄 부르는데 그게 본인이 만들어 낸 거든 작곡자나 프로듀서가 그 자리에 가져다 놨든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딱 그 노래에서만 써 먹을 수 있는 고유의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뭐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건 그거대로 이런 건 이런 거 대로 재밌다는 이야기다.
2017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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