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03

사족

이제 영화는 끝, 이래놓고 사실 하나를 더 봤다.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이라는 실로 평화로운 영화다. 트위터에서 이 영화 음악이 레이 하라카미이고 쿠루리가 부른 노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음악 때문에 본 영화다. 쿠루리는 사실 잘 모르는데 96년에 결성된 교토 출신의 락밴드라고 한다.

레이 하라카미는 좀 안다. 이 사람 특이한 게 SC-88 Pro와 Ez Vision으로 음악을 만든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SC-88 Pro 두 대에 가끔 건반 모델인 SK-88 Pro도 썼다고 한다. 이상한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나도 SC-88 Pro가 있(었)다. 내가 최초로 구입한 악기로 중고로 구입했었다.

그런데 분명 있었는데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본 기억이 10년 쯤 된 거 같다. 내 방에 있는 건 뭐든 가져다 버리는 부모님이 버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5년 간 모았던 보그지도, 핫 뮤직도, 심지어 전공 책들도 그렇게 사라졌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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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88 Pro. 사진이라도 보고 있으니 뭔가 짠 하군. 낙원 상가에서 고민하다가 사들고 와서 케이크워크에 연결해서 썼었다. 당연하지만 하라카미같은 소리는 나는 못낸다. 원래 그런거다. 하라카미는 이 기계에서 완전 뽕을 뽑았었다. 하지만 누구나 붙잡고 있는다고 그렇게 되진 않는다. 그가 좀 더 살았다면 좀 더 뽑아낼 수 있었을텐데 역시 안타깝다.

사실 나 같은 경우는 무리를 해서라도 처음 살 때 이거 대신 808을 샀어야 했다. 그랬으면 인생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도 싶다.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게 못내 아쉽다. 벌어 놓은 돈은 한정되어 있는데 베이스 기타에 앰프도 같이 사느라 저거 밖에 못 샀었다.

 

이 영화 말고 TV를 뒤적거리다가 내셔널 지오그래피인가 하는 방송에서 사형수들과의 인터뷰도 봤다. 텍사스 주의 감옥에서 집행 일자를 기다리는 사형수들이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사형수들도, 사형수의 가족들도, 그리고 그 범죄의 피해자들도, 피해자의 가족들도, 그리고 형이 집행되는 그 동네도, 그걸 촬영하는 사람도, 법률에 의해 형 집행을 매번 참관한다는 AP기자도, 교도관들도 다들 제 정신이 아닌 거 같았다. 어차피 제 정신으로는 못 살 세상이기도 하다.

 

요즘 가장 많이 하는 건 빈둥대는 거다. 할 게 없으니 하고 싶은 것도 없으니 빈둥 빈둥. 그리고 잠. 대체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깨질 않는다. 안 움직이니까 잘 안 먹게 되고, 잘 안 먹으니까 또 계속 졸리고 잘 안 움직이게 된다. 다른 건 괜찮은데 거울 보니까 얼굴색이 안 좋은 거 같아 아쉽다.

에스프레소 잔뜩을 며칠 간 너무나 마시고 싶었는데 계속 종이컵에 인스턴트 맥심 3스푼만 마셔왔다. 그러다 드디어 오늘 마시러 갔다 왔다. 하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든다. 막 혀가 따갑고,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길 바랬는데 그렇진 않았다.

이렇게 감각과 관련된 것들은 상상 속에서 부풀려진다. 군대 훈련소 있을 때 맛동산이 너무 먹고 싶어서 잠 잘 때마다 상상을 했더니 막 이미지가 커져버렸다. 결국 면회 때 먹었는데 역시 맛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상 정도는 아니었던 기억이 난다.

 

인생의 재미있던 것들을 샥샥 치우고 있기 때문에 이제 버라이어티 방송도 그만 볼 생각인데, 그랬더니 밤에 누워서 자기 전에 누워서 비쥬얼드하는 동안(이건 아직 안 끊고 있다) 뭔가 꽤 심심하다. 너무 시끄러워서 무음으로 해 놓고 한다.

그래서 컴퓨터 안에 뭐가 좀 있나 하고 찾아봤더니 예전에 오아시스 공연 보러가기 전에 예습할려고 받아놓은 맨체스터 공연이 있었다. 1시간 넘는 공연 비디오라는 건 혼자 보기엔 정말로 지루하기 때문에 졸려서 거의 안 보는데(그렇다고 지우기도 좀 그렇다) 틀어놓고 들었더니 그거 또 나름 괜찮았다. 반갑다고나 할까.

이거 말고 스톤로지스의 블랙풀 공연, U2의 더블린 공연, AC/DC의 도닝턴 공연, 뉴 오더의 511, 공연은 아니지만 토킹 헤즈의 스탑 메이킹 센스랑 다프트펑크의 인터스텔라도 있다. 내친 김에 어제 3개나 봐 버렸다.

아주 철저한 건 아니지만 공연 비디오를 봐야하거나 함 볼까 싶을 땐 이왕이면 고향 공연을 선호한다. 성공해서 돌아와 자기네 동네에서 공연하는 모습에는 좀 짠한 데가 있다. 오아시스가 공연 시작할 때 시큰둥하게 헤이, 맨체스터... 하는 부분은 좀 좋다. 뭐 사실 별 생각없을 수도 있는 거고.

 

군대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다른 건 정말 못했는데 행군 하나는 괜찮았다. 10m만 뛰어도 죽을 거 같은 체력인데 뭐 그냥 걷기만 하는 거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때 걸으면서 (할 게 없으니까) 정말 별의 별 생각을 다했는데 그러다보니 인생 전반을 반추했었다. 가능하면 이왕 한 번 사는 거 좋은 기억만 들고 간다라고 마음 먹지만 세상 일이라는 게 뜻대로 되는 경우가 없다.

기억을 되돌려보면 군 시절의 정신적 내상은 그러면서 가장 많이 입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다른 건 별로 힘든 일이 없든지, 아니면 아예 힘들어서 생각 자체를 못하든 지 둘 중 하나였다. 행군을 두 번 했었는데 두 번 다 그랬다. 생각해보니 요즘 빈둥거리며 하고 있는 거랑 거의 비슷한 거 같다. 의미도 없는 짓을 공들여가며 꼼꼼히 계속하면 역시 산화하기 마련이다. 그래도 아무 것도 안 버리고, 꽉 쥐고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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