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06

기억

일요일 밤에 술을 마셨다. 하이랜더의 자랑 글렌모렌지 싱글 몰트도, 맥주도 괜찮았고, 음식들도 아주 괜찮았지만(그 굴은 상수동 자취방에 머물러있으면 안된다) 딱 반 잔 마신 와인이 문제를 일으켰다. 역시 난 과일 술과는 맞지 않는다. 그 이후 48시간 가량을 멍하니 보냈고 이제 좀 깨어났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멍하니 있다가 TV를 몇 편 봤다.


케이팝스타는 재밌는 발란스를 안고 가고 있다. 3사의 미묘한 협력과 신경전, 참가자들의 협력과 신경전. 이것들이 만들어 낸 내러티브가 이 방송을 끌고 간다. 이제 열 명이 간추려졌고 생방송으로 신이 바뀌었다. 여기서부터는 참가자들이 만들어 낼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찾아보니까 심사위원 60, 실시간 투표가 30, 사전 투표가 10의 비중이다. 지금으로서는 이하이가 압도적이다. 한국의 아델 쯤을 찾고 있을 기획사의 입맛에도 딱 맞다. 하지만 이게 정말 흥미진진해 지려면 박지민이나 백아연, 이미쉘이 이하이에 얼마나 근접하느냐, 아니면 혹시나 드라마틱하게 잡아 내는 데 성공하느냐에 달려있다. 잔인하지만 어차피 그런 게임이다.

박진영은, 요즘 이 사람의 움직임에 관심이 많았는데, 웃기고 재미있기는 한데 흥미진진하지는 않다. 무협지에 보면 최고의 수는 무수(無手) 이런 말이 있다. 어디로 튈 지 모르면 상대하기가 무척 어렵다. 하지만 이 분은 자기 수를 그저 철저히 밀고 나간다. 거기에 수를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걸 즐긴다. 그러니 지루하다.


놀러와에 정두홍이 나왔다. 예전에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정두홍을 본 적 있다. 정말 끔찍한 사람이고, 엑스트라의 적이었다. 엑스트라는 일부 예외는 있겠지만 거의 모두 작품이 질에 관심이 없다. 어차피 작품의 질에 관심을 가질 만큼 설명해 주지도 않고, 그런 대접을 해 주지도 않는다. 대체가 손쉬운 소모품일 뿐이고, 딱 그 만큼 대접받는다. 그러므로 그저 빨리 이 촬영이 끝나고, 돈을 받고 귀가하길 원한다.

주인공의 권투 장면이 있었다. 해가 진 다음에 촬영에 들어갔다. 권투 장면만 찍으면 촬영이 마무리되는 시점이다. 실내였지만 굉장히 추웠고, 새벽부터 나와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다들 지쳐있었다. 그때 정두홍이 나타났다. 이 사람은 끔찍할 정도로 철저했다.

폭동이 일어날 기세였는데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야 뭐 어차피 할 일도 별로 없는 처지라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 이 분은 감독도, 연기자도 모두 배제시키고 혼자서 탑을 쌓는다. 자기가 원하는 완성도가 나오지 않으면 결코 타협할 타입이 아니었고, 감독의 오케이 싸인 따위가 그에게 시그널링하는 것도 없었다.

그는 폭동 위기를 조율하는 타입이 아니라 모른 척 끌고 나아가버리는 타입이다. 삼국지의 장수였다면 일기토에는 무척 능하겠지만 10만 대군을 끌고 전쟁을 치르러 가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그의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하다. 어쨋든 우여곡절 끝에 촬영은 새벽녘에야 끝이 났다.

나는 7만원을 받았고 세금으로 7천원을 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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