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22

홍대근방유람기

어제는 명동 유람을 올렸는데 이번에는 패션샵 이야기가 아니라 여기에 올린다.

계속 속이 안 좋아 요즘 매일 한 병씩은 마시고 있는 가스 활명수를 하나 사 들고 슬렁슬렁 걷기 시작했다. 사람이라면 이제 고등학생 나이가 된 닥터 마틴 구두는 무겁고 딱딱하기만 해 빨리 걷고 싶어도 걸을 수도 없다.

치실이 다 떨어진 게 생각나 그랜드 마트에 가서 100개들이 3,000원 세트를 하나 구입했다.

Photo 2월 22, 10 30 36 오후

아무리 둘러봐도 이거 한 가지만 팔고 있다. 그랜드 마트에 간간히 들리니 포인트 카드나 하나 만들자 싶어 안내 데스크를 찾아갔다. 데스크에서 안내와 배달, 비닐 봉투 판매, 담배 판매를 같이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아무도 없다.

지나가던 직원들도 아니 어디에 간거야라는 말만 하지 굳이 찾을 생각은 안한다. 커다란 생리대 세트를 들고 비닐을 구입하기 위해 서 있는 일본 아가씨와 약 3분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가만히 서 있다가 포기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이어폰을 귀에 꼽고 약간 서늘한 저녁의 거리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스티비 원더의 빅 브라더, 핑크 플로이드의 산 트로페즈, 벨 앤 세바스찬의 이즈 유어 핏 인 더 시, 퀸의 타이 유어 마더 다운, 아이유의 나만 몰랐던 이야기가 차례대로 흘러나왔다.

astray

걸으면서 주변의 가게들을 구경했다. 1번 지역에는 의자 세개짜리 조그마한 커피집이 하나 있었다. 지나가다 안을 쳐다봤더니 헝클어진 머리에 오리털 잠바를 입고 뿔테 안경을 낀 주인 혹은 알바생이 혼자 앉아있다가 나를 쳐다본다.

2번 지역 골목에는 북 앤 쿡, 혹은 쿡 앤 북이라는 북 카페가 하나 있다. 북 카페라지만 그렇게 조용한 분위기도, 책이 많은 분위기도 아니었지만 외진 곳에 있는 게 조금 맘에 들었다. 여전히 북 카페라면 나중에 소개시켜 줘야지 하며 챙겨놓는다. 주변 골목 구석구석에 한번쯤 와 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곳들이 몇 군데 있었다.

 

그리고 2010년과 리비아를 생각했다.

두 명의 진씨 성을 가진 사람을 만난 해. 두 명에게 버림을 받았던 해. 그리고 소리없이 꺼져 들어가는 늪 속에서 아직은 나무 뿌리 몇 가지를 손에서 놓치 않고 간당거리며 버티고 있던 해.

용병들이 민주화 시위를 하는 시민들에게 기관총을 쏘고, F16이 시위대에 폭탄을 날리는 나라. 몇 명이 죽었는지도 모른 채 고립되고 있고, 멀고 먼 동쪽의 어느 나라 방송에서는 살 길을 강구하는 자들을 폭도라 이름짓고 신문에서는 석유값 걱정만 하게 만드는 나라.

 

좀 많이 걸을 생각이었지만 속이 너무 안 좋고 어지러워 포기하고 상수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공덕역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고 또 우르르 타는데, 분명 빈 자리들이 많은데 어떤 남자가 굳이 내 옆에 와 앉는다.

사람 별로 없는 식당이나 커피집에서 바로 마주보는 자리에 굳이 앉는 사람들과 화장실에서 빈 칸 많은데 굳이 옆 자리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내가 세상에서 파쇼와 권위주의자 다음으로 싫어하는 인간 군상이다.

자리를 옮길까 하다 만사가 귀찮아서 요즘 포드캐스트로 듣기 시작한 컬투쇼를 들으면서 눈을 감았다. 옆자리 앉은 인간 군상은 멘스헬스라는 잡지를 꺼내 들더니 끊임없이 몸을 움직인다. 뭔가를 계속 떨어뜨리고 다시 줍는다. 한숨이 나오려고 했지만 컬투쇼가 꽤 웃기는 바람에 웃음이 먼저 튀어나왔다. 웃음은 날카로워진 신경을 완화시켜준다.

 

한동안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어딘가에서 강렬한 라일락 향기가 몰려온다. 대체 어떤 종류의 향수가 이렇게 직접적이고, 대체 어떤 종류의 사람이 이 시간에 이렇게 향수로 목욕을 한 듯이 지하철을 탔을까 궁금해 고개를 들어보니 건너편 아가씨가 라일락 꽃다발을 들고 있다.

꽃다발이 무척 예쁘다. 하지만 지하철 등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사람에게는 라일락 꽃다발 같은 건 주지 않아야겠구나 하고 생각한다. 동네 어귀에 한 그루만 있어도 라일락 향이 진동하는데 밀폐된 지하철에서는 가히 굉장하다.

댓글 1개:

만사, 음색, 포기

1. 다이어리를 쓰게 되면서 펜을 어떻게 가지고 다닐까가 문제가 되었다. 사라사 볼펜을 쓰고 있었는데 너무 커서 다이어리에 들어가지 않는다. 어케어케 검토 후 사라사, 제트스트림, 유니볼, 무인양품 볼펜 등이 공통 규격의 심을 사용한다는 걸 알게 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