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09

기록, 음울, 날씨

1. 조선시대 왕 옆에는 예문관에서 파견나온 사관 두명이 항상 앉아 있었다. 8명이서 돌아가며 24시간 교대 근무를 하며 왕이 하는 말, 행동, 왕에게 올라온 상소를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왕은 중요하니까.

그런 것도 아닌데 머리가 나빠서(잘 잊어버린다), 호기심 때문에(테스트로) 이런 저런 앱을 설치했더니 기록할 게 너무 많다. 운동도 기록하고, 스케줄도 기록하고, 할 일도 기록하고, 흡연량도 기록하고, 잠자는 시간도 기록하고, 가계부도 기록하고, 어디 가면 포스퀘어로 체크인도 하고, 뭐 먹으면 사진도 찍고, 심심하면 트위터도 올리고, 이렇게 블로그도 올린다.

괜히 부산하다는 건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꼭 필요함 혹은 부담없는 재미를 넘어서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비서가 없는 자는 그렇게 열심히 기록하지 않아도 되.

 

2. 어제부터 일진이 안좋다. 뭔가 좋지 않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는 게 경험적, 감각적으로 느껴진다. 이럴 때는 어딘가 숨어들어가 궁싯거리며 앉아있는게 가장 좋은데 딱히 갈 곳도 없으니, 그저 조용히 즐거운 나날로 돌아가기를 기다리는게 상책이다.

 

3. 날씨가 다시 추워진다고 한다. 오늘, 어쩌면 내일 정도까지 그나마 오후의 햇빛을 만끽할 수 있고 당분간은 또 움추러들어야 한다. 설 연휴 마지막 날이 입춘이었는데 단어가 참 보잘 것 없다.

 

4. 이제 며칠 지났을 뿐이지만 금욕의 생활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담배도 팍 줄였고, 술은 원래 안마시고, 밤에 대나무 향을 피워놓고 조용히 녹차를 마시고, 밥도 시원찮게 먹고, 19금도 멀리 하고,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도 거의 안 본다. 만나는 사람은 극히 한정되어 있는데 그것도 매우 뜸하다. 굶어 죽었다는 작가 이야기가 남 이야기 같지가 않다. 어쨋든 뭔가 이것저것 생각나는 게 있어도 그냥 언젠가 다음에 하면 되겠지 하고 미뤄놓고 있다. 조용히 걷고, 말은 거의 안한다. 이런 시기에는 블로그 포스팅이 늘어난다. 필요없는 것들을 쉴 새 없이 떠들 운명이다. 이런 거라도 없었으면 어디 지하실 구석 벽에 쉴 새 없이 낙서를 하다 지쳐 쓰러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면 비슷한 경험이 있다. 그게 기분 나쁘다.

 

5. 며칠 전 포스팅한 냄새의 정체에 아무리 봐도 나도 어느 정도 포함되는 거 같다... 겨울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시간은 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둘 다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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