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605

감정의 콘트롤, 그리고 시위

요 몇주간 감정을 콘트롤하는 방법을 잃어버렸다. 꽤 오래간만에, 급작스럽게 찾아온거 같다. 조용 조용히 촛불 문화제에 찾아가 가만히 앉아있다가 돌아오곤 했는데, 인터넷으로 생중계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알아버린게 결정적이었다.

처음으로 방송을 본 5월의 마지막날 몸과 정신이 엉망이 되며 그렇게 지나갔다. 어쨋든 지금이라도 방점을 찍고 지나가야한다. 못살겠다. 그래서 이 글은 아마 조금, 조금 많이 길어질 것이다. 그 리고 그 누구도 읽을 엄두마저 나지 않을 정도로 지루하게 나갈거 같다.


1. 인생 첫번째 시위

임프레션은 기억을 압도하기 때문에 아마 많이 틀릴거다.

신입생들은 선배들과 한명씩 조를 만들어줬다. 룰은 간단하다, 움직이라고 할때 움직이고, 멈추라고할때 멈추면 된다. 누군지 기억은 안나는데 선배 한명이 들어와 아무말 없이 칠판에다가 시간과 장소를 몇개 적었다. 만약 시위대가 진압으로 분산되었을때 모일 장소란다. 도청이 되고 있다는 소문이 있고, 마침 얼마전에 영문과 과방에서 도청기가 발견된 일이 있었다. 그게 누구건지, 정말 도청기인지 그런건 모른다. 어쨋든 중요한 사항에 대해선 아무도 입밖에 내지 않는다. 공기가 꽤 무겁다.

마음이 꽤 복잡했는데 다치거나 잡히면 어떻하지라는 생각과 뭐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뒤섞여있었다. 사수대 인원이 부족하다는 연락에 선배 몇명이 나갔다. 파이프 같은 것들을 나르는 모습이 멀리 보인다. 여하튼 나는 같은 조인 선배 한명만 잘 따라다니면 되는거다.

이리저리 흩어져서 집회 장소에 도착했고 꽤 지리한 행사가 이어졌다. 봄날 특유의 따스한 햇빛과 답답하고 뿌연 공기 뭉치들. 이런 사람도 나오고 저런 사람도 나오고 안타까운 사연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출정 선언문 낭독이 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줄을 맞춰 거리로 나갔다.

그 다음은 잘 모르겠다. 뭐가 어떻게 돌아간건지도 잘 모르겠는데 날 쳐다보면서 욕하고 쫓아오는 스노우진 입은 아저씨를 봤다. 죽자고 선배 뒤만 따라 열심히 도망갔다. 정말 죽을거 같았다. 밤이 되고, 시위가 마무리되고, 술집에 앉아 밤새 술을 마시며 그렇게 그 날은 지나갔다.

몇달이 지난 다음엔 페퍼포그를 쳐다보면서 (불꽃이 튀며 12발인가 연발이 발사되는 모습은 나름 장관이다) 날라가는 최류탄이 어디 떨어지는지 보고 쫓아가 신문지로 감싸 불을 붙이고 다니며 놀게 되었다. 그렇게 하면 최류탄의 매운기가 많이 사라진다. 사수대나 파이프 같은거 드는거에도 껴보고 싶었지만 나같이 힘없는 사람이 끼는건 민폐라 관뒀다. 나 때문에 다 고생하면 곤란하다. 내가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이 기침을 한다. 그것 참.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서 같이 모여 가는 집회는 관뒀다. 운동권 특유의 그 다정다감한 말투들도 짜증나고, 나름 갖춰져있는 위계 질서도 짜증나고 뭐 그랬다. 그냥 벽보보다가 옳다고 생각되는 집회만 찾아갔다. 혼자도 가고, 마음 맞는 사람있으면 같이도 가고. 매년 꼭 찾아갔다고 할만한건 서울에서 열리는 5.18 추모 집회 정도. 망월동은 못가봤다.

철거민 연합 시위하길래 쫓아가본적도 있고,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안나는데 반미 시위도 갔었다. 학생이 주도가 아닌 집회는 난이도가 좀 높다. 어지간한 체력으로는 따라가기 힘들다. 그리고 절박하다. 너무나 절박해서 내가 학생인게, 그들과 같은 처지가 아닌게 미안해진다.


뭔가, 세상을 낫게 만드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마음들을, 그 치열함을 알아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지만 물론, 세상은 그렇게 쉽게 쉽게 안돌아간다. 정말 말도 안되는구나 싶은 일들은 매번 일어난다. 시위에 나가는 사람들은 그나마 순진하다. 그게 옳다고 믿고,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질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민들의 이런 움직임 뒤에서 주판알을 튀기는 손길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생각해보면, 동학 혁명으로 이익을 본건 일본이었고, 4.19가 끝나고 박정희가 집권했다. 80년 5월 벌어진 수많은 시위는 16일에 소탕되었고, 그 결과는 광주의 5.18과 전두환의 집권이었다. 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를 얻었지만 구로구청 투표함 사건이 있었고 노태우가 집권했다.

도대체 이 사건들로 몇명이 죽었을까. 몇명이 가슴을 쳤고, 몇명이 눈물을 흘렸을까. 그리고 우리는 과연 뭘 얻었을까.

분명히, 뭔가 발전했다. 남산으로 끌려간다는 사람도 이젠 없고, 대통령이 군인도 아니다. 여전히 국보법과 집시법이 있지만 예전처럼 위력을 발휘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지금 2008년 우리가 보고 있는 결과물이 이 모든 희생의 결과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너무 억울하다. 그때 그 시절 고문을 하던 검사도, 군부에 협력해 한몫 잡았던 경영인도, 아니 그보다 더 앞으로 일제 시대 우리를 괴롭히고 착취하던 동족들도, 그보다 더 뒤로 기자를 성희롱하던 국회의원도 여전히 비슷한 자리에서 비슷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이런 아픔과 시련들에도 자신의 집시법 위반 경력이, 운동 활동 경력이 혹시나 촛불 집회에 누가 될까봐 뒷편에서 촛불이라도 하나 들고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들은 대단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하다.

잘 모르겠다. 정말 잘 모르겠다


2. 조선일보

아주 오래전, 지금은 이런말을 하는게 민망할 정도로 엉망으로 살고 있지만, 좌파적인 생각을 지니고 살아야겠다라고 생각한 다음부터 조선일보는 내 머리 속에서는 그냥 세상에 없는 신문이 되었다. 신석우, 안재홍이 사장이었던 시절에는 그래도 조선일보가 괜찮은 신문이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 꽤 심각한 노선이다. 나는 아마 그 길을 따르지 않겠지만 저런게 식민지하에 존재하고있다고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런 시절은 잠깐이었다.

그 버라이어티함과 중독적인 문체, 앞뒤가 하나도 안맞는 얼토당토한 내용, 교묘한 외신 짜집기 이 모든게 짜증이 났다. 전두환 정권 시절 우민화 방편으로 프로야구 창단, 국풍 80 같은게 있었는데 최고의 우민화 정책은 조선일보가 가장 영향력있는 신문사가 되버린 일이 아닐까 싶다. 이 신문은 사람을 정말 아무 생각없게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다.

그래서 뭔가 이것들을 어떻게 할 방법없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내 힘으로 마땅히 생각나는건 없고 그래서 그냥 없는 놈이라 생각하기로 한거다. 눈에 띄는 활동이라봐야 주변 사람들에게 조선일보의 실상을 전하고, 지하철 선반위에 놓여있으면 다른 사람 볼까봐 휴지통에 버리는 정도 뿐. 그러다가 손석춘의 책이 나왔길래 읽어도 봤고, 안티 조선 운동을 하길래 그것도 좀 열심히 찾아 보고, 딴지일보 초기에 조선일보 분석이 한동안 나왔었는데 그것도 열심히 봤다. 나보다 몇백배는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들이 사실 많이 있다.

요새, 촛불 시위와 더불어 안티 조중동 운동도 한참이다. 광고주 불매 운동이니 항의 전화니 역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니까 그나마 좀 위력적으로 전개되는거 같은 느낌이다. 그래도, 요새 들어 이런 일도 있었어요(일본 천황 만세), 저런 일도 있었어요(방사장집 조망권을 해치지 않기 위해 지어진 아파트) 하는게 게시판에 오르고 이런 일도 있었구나하며 흥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지금까지 나도 그렇고, 손석춘도 그렇고, 안티 조선도 그렇고 뭐했나 싶다. 꽤나 이리 저리 애쓴거 같은데 이토록 아무에게도 안알려졌구나.

지금 벌어지는 일이 과연 좋은 성과를 남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잘 되면 좋겠다. 우리나라가 잘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건 이런 반민주적, 반시민적인 잔재물들을 배제시키는 일이라고 나름은 생각하고 있다. 방어적 민주주의. 바로 그거다.


3. 사실대로 말하자면 광화문과 시청앞에 깔리는 태극기와 애국가, 이순신 장군의 동상과 예비군복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격분해서 뜯어내고 페인트를 붓는다든가 하는짓은 물론 안하지만 불편한건 불편한거다.

국익. 우리의 이익이라면 어쨋든 OK라는 민족주의 성향은 무섭다. 이건 다른 나라 사람을 착취해도 국익이면 괜찮다는 제국주의와 단 한끝 밖에 다르지 않다. 한순간 뭔가 잘못 주입되면 TV에서 본 이라크에 가서 그들을 다 청소해버리고 오겠다는 이라크전 출병을 앞둔 20대 초반의 미군 해병처럼 되버린다. 그도 국익을 위해 그 자리에 있다.

지금은 이성이 이 집단의식을 잘 제어하고 있지만 감정은 언제나 뒤에서 움크리고 있다. 감정은 격동적이고 파동도 크다.

더 큰 문제는 이게 국가간의 카르텔 게임과 비슷해져서 먼저 누군가 관두면 손해가 막심해진다는 사실이다. 국가간의 문제를 콘트롤할 수 있는 제도의 부재와 자국 시민들에게 표를 얻어야하는 정치인이라는 백그라운드는 이 게임을 더 강하게 만들고 영속적으로 만든다.

인권 앞에 서있는 민족주의는 없다. 민족주의에 대한 열망은, 국가에 대한 열망은 분명히 뷰를 좁게 만든다. 아주 간단한 원리로 작동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게 지금 이익인가 아닌가. 편을 가르는게 너무 쉽고 내재된 배타적 성향은 동의하지 않는 자를 배제시키게 된다. 관용의 폭이 너무 좁다. 이걸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겐 너무나 좋은 소재다. 그래서 두렵다.


4. 어쨋든 지금은 다음을 준비해야 할때다. 지금 정권은 아마 항복하지 않을 거다. BBK 김경준이 예전에 말했던대로 지금 대통령은 옆방으로 가고 싶을때 문으로 돌아가는게 싫어서 벽을 뚫고 가는 사람이다. 뭐 알아서 관두고 그럴 사람이 아니다.

경영인이라는 직업은 사태를 가급적 단순하게 판단하는게 유리하고, 아마 이 복잡한 문제를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있을 가능성도 크다. 예전에 김영삼 정권 시절에 세상에 이런 사람이 다 있구나 싶었는데 이건 뭐, 무천도사와 베지타 만큼이나 레벨 차이가 나는거 같다. 베지타는 자존심이라도 있었지. 몰라, 하고 싶은대로 할래. 그게 그의 생각같다.

그렇다면 천상 우리는 한나라당과 정부를 떼어놓는 일을 해야한다. 오늘 선거가 있었고 한나라당이 졌다. 수도권과 영남권에서의 패배는 좀 아플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선거가 있다. 계속 지금 정부가 이렇게 인기가 없다면 여당은 어쨋든 고민에 들어가야한다. 열린우리당이 선거를 앞두고 노무현을 헌신짝처럼 버렸듯이 선거는 냉정하다. 대통령이 누구든, 국회의원의 목표는 재선이다. 우리나라 시스템으로는 어지간하면 정책이고 나발이고 재선하기 위해선 뭘 해야하는지가 제일 중요하다.

시민 정당의 꿈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불가능하다. 시위에 주도점이 없는건 역사적으로 큰 장점이고, 거시적으로 우리를 한단계 발전시킬 훌륭한 경험이긴 하지만, 미시적으로 이 다음에 어떻게 할건가의 대책이 별로 없다는 점이 조금 아프다. 일단 지금 정부는 물리쳐 줄테니 그 다음은 다시 정치권이 알아서 해결하라가 지금 시위의 애티튜드같다. 물론 엉뚱한 짓 하면 또 나선다라는 견제가 있으니 아주 멋대로 하지는 못하겠지만, 어쨋든 이걸 처리할 사람들도 지금으로선 그 밥에 그 나물이다.

만약 누군가 주도 세력이 있고, 사람들이 이 정도로 동조한다면 혁명이 되고, 헌법을 바꾸고, 새 나라를 만들어버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상태가 아니다. 이건, 평범한 시민들의, 그것이 조선일보 때문이든 뭐 때문이든, 운동권, NGO, 좌파, 대안 조직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에 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위가 마무리되고 나면 이들에게도 자신을 다시 성찰할 꽤 깊은 아픔을 줄 것이다.

이승만 하는 짓이 너무 미워서 4.19가 일어나고 100명도 넘게 사람들이 죽을때도 꼼짝않더니, 미국 대사가 시위대 지지한다고 한마디 하니까 이승만은 그날로 바로 그만 둬버렸다. 그리고나서 과도정부에게 넘겨줬더니 허정이 자유당 시절하고 하등 다를거 없는 똑같은 정책만 내놨다. 그 후의 일은 잘 알려져있다. 군부 재집권 같은 일이야 이제 없겠지만 여튼 애써 한 시위의 결과가 이런식으로 나타나는 일이 또 안생기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한다. 사실 정말 어려운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오랜 기간을,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 결과물이 흐지부지하면 슬플거 같다. 지금까지 매번 느꼈던 그 괴로움. 술집 거리의 떠들썩한 젊은이들과 고요한 주택가를 지나며 대체 뭘 위해 난 이러고 있나 하는 그 자괴감.

그래도, 아마 뭐가 나타나도 지금보다는 나을거 같다는 믿음에 일단은 중요한, 머리수라도 채우려고 나가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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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차, 평화,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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