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31

일요일의 막차

예전에 ELO 노래 중에서 Last Train To London이 있었나 그랬다. 일요일 밤이다. 지하철에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원하는 좌석에 마음대로 앉을 수는 없을 정도의 빈도. 나는 문 바로 옆 의자에 앉아있었고 옆의 옆자리에는 어떤 여자가 앉아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혹은 막 연애를 시작하려는 느낌의 기나긴 통화를 하고 있었다.
긴 의자의 반대쪽 끝에는 여자 한 명이 앉아 있었는데 잘 보이지 않았다. 그도 꽤 큰 목소리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압구정에서 놀까, 홍대에서 놀까를 고민하는 중이다. 일요일 밤에는 어디서 놀까 살짝 궁금해졌다.
그리고 건너편에는 처음에는 남자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 보니 여자인 사람이 연신 갤럭시 탭과 휴대폰을 번갈아가며 반대쪽 끝 여자의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다. 털모자와 목도리로 칭칭감아 잘 몰랐다.
갤럭시 탭의 셔터음 소리가 훨씬 크다. 덩치가 크니까 셔터음도 크게 집어넣은건가. 핀볼 게임을 하면서 대체 무엇 때문에 전화를 걸고 있는 여자의 사진을 저렇게 찍고 있나 궁금해 하다가 아, 혹시 개나 고양이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폰을 빼고 살짝 왼쪽을 쳐다봤지만 옆 자리 사람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맨 끝의 여자는 전화를 끝내고 여전히 큰 목소리로 건너편에 사진을 찍고 있던 여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목소리를 듣고 여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나서 살짝 보니 대체 왜 처음에 남자라고 본 건지 모르겠다.
그러는 사이에 갑자기 시커멓고 머리가 무척 큰 물체가 바닥으로 내려온 기척이 느껴졌다. 나를 잠깐 봤지만 이내 시선을 돌렸다. 머리가 큰, 종을 잊어버렸는데 여하튼 흔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모를 정도는 아닌 강아지다. 새까만 퍼머 헤어인 그는 멍한 표정을 하고 있다. 저런 멍한 표정을 하나 배워 놓으면 참 쓸모가 많겠다 싶은, 완벽한 멍한 표정이다.
여자 둘이 의자 위로 올라오라고 재촉을 하자 강아지는 고민을 하는 빛이 역력했다.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은 없다. 두 여자를 쳐다보지만 도움을 줄 기색은 아니다. 우리집 막내도 침대 위나 무릎 위로 올라오라고 재촉하면 저런 표정을 짓는다.
번쩍 뛰었지만 아쉽게 앞 발 둘만 의자에 기대고 말았다. 웃겼는데, 아무도 웃지 않는다. 내 옆의,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혹은 막 연애를 시작하려는 느낌의 기나긴 통화를 하는 여자는 연신 상냥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제가 부족한 탓인가봐요라며 자책을 하더니 오늘 열심히 일했다고 자랑을 한다.
신당역이 다가왔고 홍대입구역으로 갈 것인가, 상수역으로 갈 것인가를 고민하던 두 여자와 까만 강아지는 내리기로 결정한다. 밤에 두 여자가 홍대입구 어딘가에서 신나게 놀면 강아지는 어디서 뭘 하게 될까 궁금해졌지만 물어볼 수는 없다.
환승 통로의 에스컬레이터는 모두 멈춰있다. 전기를 아껴야 한다는 말만 나오면 가난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부터 먼저 끊어대는 옹졸하고 졸렬한 발상에 화를 내며 계속 걸었다. 1994년부터 내 펠로우가 된 닥터 마틴 신발의, 반질반질하게 닳아버린 밑창 때문에 연신 미끄러웠다. 뭘 좀 먹고 싶은데... 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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