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03

관념의 태양

1. 승부역에 갔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 가보고 싶었고, 예상대로 아무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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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둠 속에서 본 것은 산처럼 쌓인 눈, 미치도록 많은 별, 지나가는 화물열차, 택시를 타고 와 역으로 가시던 두 할머니, 화장실 불 켜는 스위치 위치를 알려준 역무원.

여기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고, 조만간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


2. 삼척을 돌아다니다 찜질방을 찾아갔다. 사람은 무척이나 많았다. 연말 가요 방송이 나오던 티브이에서 2011년을 알리는 카운트 다운을 했고, 스파빌이라 적혀있는 아래 위 세트 옷을 입은 사람들 중 몇 명은 박수를 쳤고, 몇 명은 옆에 있는 사람들과 새해 인사를 했다.

불이 꺼지고, 티브이의 볼륨이 줄어들고 어수선함 속에서 잠을 들기 위해 뒤척였지만 영 잠이 오지 않았다. 옆에선 천안에서 왔다는 어린 학생 커플이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사방에서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이나 되어 찾아온 몇 명은 빈 자리를 찾느라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한시간 쯤 눈을 붙이다가 분주한 소리에 다섯 시에 눈을 떴다. 벌써 많은 자리가 비워졌다. 불과 한시간 전의 광경과 너무나 다르다. 여기까지 왔는데, 하며 우리도 일출이나 봐보자 하며 목욕탕으로 갔다.

목욕탕 대기실은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과 부모님 손에 이끌려 와 얼굴이 팅팅 부어있는 아이들로 만원이었다. 몸을 씻고 가만히 앉아있는데 목욕탕 관리인 아저씨가 사람들에게 지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불현듯 작년 같은 날 속초에 퍼부어대는 눈 속에 갇혀, 고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뭐가 어찌되었든 남쪽으로 내빼기로 했다. 여행은 해프닝이라는 점에서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지만, 또 여기에 갇힐 수는 없다.

바로 옷을 챙겨입고 7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눈은 산처럼 내려 쌓이기 시작했고, 어둠 속에선 바로 다른 차들의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간간히 보이는 앞 차의 브레이크 등을 바라보며 계속 남쪽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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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한 시간은 6시, 인터넷으로 확인한 울진의 일출 시간은 7시 38분. 아이폰으로 확인한 위성 사진으로는 포항 쯤까지 내려가면 그래도 볼 수 있을 듯 했지만, 결국 시간상 포기하고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7시 35분 이전에 도착 가능한 가장 아래, 예전에 한 번 가본 적있는 고래불 해수욕장으로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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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불 해수욕장에는 7시 32분에 도착했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명사십리 해수욕장이지만 아무리 관념의 태양이라도 차 안에서 맞이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평소엔 별 생각이 없다가도, 이왕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리 집착하게 된다.

경북 경계를 내려서며 여기엔 아직 눈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걸 알았지만, 동해 수평선 방향은 구름이 잔뜩 있었다. 영하 2도 밖에 안되었지만(전날 서울은 영하 10도, 승부는 영하 15도였다) 온 몸이 얼어붙을 듯 추웠다. 의외로 고래불 해수욕장 같은 곳에도 사람들이 꽤 나와있었다. 7시 38분이 되었고, 아마도 떠오르고 있을 해를 생각했다.

2011년이다. 보고 싶지 않았던 한 해가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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