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331

벳키가 잘 됐으면 좋겠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건 사실 이글루스 쪽이 좀 더 어울리기는 하다. 그런데 묘하게도 또 완전 허튼 소리를 할 거면 여기에 쓰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이글루스 스킨 바꾼 다음에 마음에 안드는 부분도 미묘하게 있는 점도 있고.

어쨋든 연예인들 중에 개인적으로 왠지 잘 됐으면(성공이라기 보다 좋은 사람 만나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정도) 좋겠다하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이런거 시리즈로 만들면 몇 달은 우려낼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기는 한데 (-_-) 당연히 내가 편안해하고, 마음에 들어하는 인상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 중에 하나가 벳키다.

일본 버라이어티를 요새는 거의 안 보니까 벳키본 지도 꽤 오래됐는데, 오늘 문득 오래간 만에 우타방이나 한 편 봐볼까 싶어 뒤적거리다 생각났다. 2월 23일 방송한 벳키와 개그맨인 하지메가 양가 어머님까지 모셔다 선보는 내용.

[우타방]20100223벳키,폴인러브하지메,콘도마사히코.avi_001069891

왼쪽이 하지메, 오른쪽이 벳키, 인사가 끝나고 스튜디오 뒤쪽에 마련된 정원에서 데이트 중. "나중에 두 사람은 분명히 이야기 할거야... 첫 데이트는 우타방이었다라고"라는 자막이 꽤 좋았다. ^^

벳키도 분명 하지메가 여자 친구가 있다는걸 알고 있을텐데 풋풋한 느낌을 잘 전달해 주는게 꽤 재밌었다. 예전에 도모토 쯔요시가 하던 쇼지키 신도이에 나왔을 때도(도모토 쯔요시도 잘 됐으면 하는 사람 중에 한 명인데, 딱히 응원 따위 없이 가만 둬도 워낙 잘 되는 사람이라-) 비슷한 느낌을 폴폴 풍기고 있었다.

특유의 텐션 높음도 그렇지만, 거기에 애같은 면모와 소녀같은 감성도 잘 섞여있는, 여튼 보고 있으면 밝아서 즐겁다. 다만 가수인데 노래는 그냥...

새 노래가 나왔나보다. 컨셉이 청춘이라기 보다는, 살짝 더 어린 상큼한 느낌이다.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단순한 내용이지만 살다 보면 그런게 더 와닿는 날도 있는 법이지.

 

스키다카라(좋아하니까)

너의 걷는 속도가 빠른 건 기분 탓일까?
손을 뻗어도 닿지않아
같이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 기쁜 일이야

다시 나 자신을 타일러 마음 눈물 혼자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너에게도 전해주고 싶어져
그것이 좋아한다는 증거야

정말로 좋아하니까..그러니까
네가 알아차린다면 너에게 부딪혀보고 싶어져

자기도 알 수 없게 되버려
정말로 좋아하면서..하면서..
하면서...


한 번 더 만나고 싶어

20100330

가지고 있는 의문점

1. 여러가지 정신 질환이 있다. 조울증, 우울증을 비롯해 정신 지체, 과대 망상, 정신 분열 등등등.

2. 이들 중 어떤 사람은 치료를 받고 있거나, 정도가 나아지고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정도가 심해지고,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분야에 대해 식견이 부족하지만 병에 걸려있다는 자기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세간의 소문에 따르자면 병이 있다는 인식을 못하거나, (타인이) 인식할 기회조차 없는 경우도 많이 있을 것이다.

3. 어쨋든 세상에 존재하고, 또 목격되기도 한다.

4. 몇 달 전 지하철에 올라타자마자 목격한 모습은 다음과 같다. 당시 나의 판단은 배제하고 팩트들만 나열.

a) 어떤 여자(F)가 바닥에 누워서 소리를 치고 있었고, 어떤 남자(M)가 입을 막은채 위에서 누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쳐다보고 있지만 가만히 있었다.

b) 지하철 맨 앞칸 이었는데 기관사 분이 문을 열고 나와 "지금 뭐하는 거에요!"라고 소리를 질렀고, M는 F의 입을 막은 채 "제 여자친구에요!"라고 답했다. 기관사 분은 잠깐 쳐다보더니 다시 운전을 하러 갔다.

c) 그 사이 F가 빠져나와 웃으면서 달려갔고, M은 선반 위에 놓여있던 가방을 들고 쫓아갔다. F는 계속 M을 놀리듯 도망쳤는데 그러면서 다른 여자 승객의 묶인 머리를 잡아 당겼다.

d) F는 결국 다른 칸으로 도망, M 계속 쫓아감.

5. 우선 a)에서 아니 무슨 일이지? 왜 가만히들 있는거지? 잠깐 뭔가 이상하다 등의 생각이 거의 찰나에 발생했다. 일단 보이는 장면은 M이 F를 괴롭히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대개는 뭔가 이상하다는걸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 있다.

물론 매우 멀쩡해 보여 오래 걸리는 경우도 있고, 끝까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b)는 이 글의 주제와 다르지만 조금 이상한 부분이다. 굉장히 소란스럽고, 누군가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기관사는 공익 요원 등 역무원을 부르지 않고 그냥 출발시켰다.

c)에서 상황이 보다 확실해 진다. F는 뭔가 정신병에 걸려있다. M의 경우도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주어진 상황만 가지고는 확신하기 어렵다.

d)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몇 정거장 뒤에 멈춘 역 플랫폼에서 약간의 소란이 들려왔다.

6. 자, 정신 질환에 걸린 사람들은 피해를 줄 수 있다. 하지만 격리가 최선인지는 잘 모르겠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테고, 격리가 나은 경우도 있겠지만 아닌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자신이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는걸 전혀 (주변에서 조차)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우리 나라 사회 안전망이라는게 굉장히 허접하기 때문에 치료의 기회를 아무나 가질 수 있는게 아니다. 상처가 나서 소독약을 발라주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결국 살면서 이들과 마주치게 된다.

7. 그렇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설득, 타이름이나 설득 같은건 아마 통하지 않을 것이다. 5번 사례에서 c)를 목격하며 생각난 것은 F가 그 상황을 숨바꼭질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매우 재미있어 하고 있었고, 즐기고 있었다.

그렇다고 강압, 폭력도 통하지 않는다. 강압은 역효과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거니와, 어차피 말귀가 통할 리도 없다. 폭력은 불법이다.

7-1. 첨언해 만약 위 5번 사례에서 피해를 받은 사람(머리를 잡아당기는 모습만 목격했지만 나중에 보니 할머니 한 분의 안경이 부러졌고, 큰 피해는 아니지만 다친 사람이 조금 있었다)이 M과 F를 붙잡아 소송을 제기한다면 보호자인 M가 책임지게 된다. 기관사의 소속인 지하철 공사의 책임도 있을 듯.

물론 가정했던 바와 같이 M 역시 한정치산자라면 책임을 물을 만한 사람은 지하철공사 밖에 없다. 안경이 부러진 할머니는 어찌할 바를 모를 수 밖에 없을 듯.

8. 그렇다면 회피가 옳은 방법인가. 결국 모두들 눈치채면 피하는 방법 밖에 없는 건가? 이런 사람들과의 대화는 아마도 고도의 훈련을 받은 사람에 의해 가능할 것 같다. 그리고 나 같은 문외한이 어설프게 대처하면 더 복잡해진다.

가끔 인터넷 게시판에 (악플이 아닌) 저런 류의 댓글이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 분노, 황당, 설마? 정도로 마무리 되게 된다. 어차피 누구도 대화가 불가능하니 그럴 수 밖에 없을 듯하다.

9.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20100324

선거라는 의사결정 행위

지방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그러면서 또 예의 그 논의 - 전략적 투표, 최악을 제거하는 투표가 옳은가 원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는게 옳은가 - 가 다시 수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 논쟁은 예전 노태우 선거때 부터 끊이질 않는 문제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만 있는 특별한 논쟁도 아니고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논쟁은 있다.

사실 결선 투표제를 도입하면 이 문제의 많은 부분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다. 여권에 대항하는 여러 후보들이 단일화되지 못하는 이유는 서로 추구하는 바, 상정하고 있는 미래에 대한 애티튜드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무척이나 크고, 사실 정당의 정체성과 관련되는 중요한 문제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나라당이 절대 배제되어야 할 곳이고 민주당, 민노당, 진보 신당 등은 그래도 엇비슷한 편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한나라나 민주당이나 둘다 배제되어야 한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요는 사람마다 그어놓은 선의 위치가 다르고, 그러므로 최선이니 차악이니 하는 솔루션 자체도 다르다. 또한 이로 인해 후보 단일화같은 전략적 절차도 어려운 문제가 된다.

집권 여당이 결선 투표제 도입을 안하는 건 당연하다. 결선 투표제는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어려운 후보 단일화를 제도화 시켜준다. 그러므로 집권당에게는 거의 아무런 이득도 없다. 이건 의회 구성원 비율이 특수한 상황에서 실현될 수 있는 법안이다.

 

어쨋든 전략적 투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투표는 최악을 제거하고 차악을 선택하는 행위 같은게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한다. 어차피 투표라는건 직접 민주주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임의적으로 만들어낸 절차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정략을 배제한 채 각자 원하는 정당에 투표하는 행위는 직접 민주제에 가장 가까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내가 직접 할 수 없으니, 가장 의견이 가까운 사람에게 사심없이 투표하는게 사실 정답이다. 그리고 그 투표 결과는 그런 민의를 여과없이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견해에는 문제가 있다. 우선 대의 민주주의의 투표 제도라는게 완벽한 제도가 아니다. 이건 엄연히 대안, 그것도 좀 많이 부족하지만 이것보다 나은 방법을 찾을 수가 없어서 상정되어 있는 방법에 불과하다.

그리고 또한 투표라는 행위는 자체가 전략적이다. 어떤 사람은 최선을 뽑고자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최악을 배제시키고자 한다. 둘 다 비슷한 무게의 함의를 가지고 있는 정치적 결정이다.

어차피 투표라는 단순한 행위가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견해를 포섭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애티튜드를 취할 지를 정해야 하고, 그 결과로 전략이 개입될 가능성이 만들어진다.

여기서 투표를 하지 않는 행위의 정당성도 확보될 수 있다. 사실 이게 문제인데 - 無는 pros나 cons와는 아주 다른 파생들을 만들어낸다 -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투표 의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이 모든 건 투표 제도, 더 넓게는 대의 민주주의 제도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모순점이다. 인터넷의 발달이 이 문제들을 커버할 어떤 대안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지만, 아직은 아니다.

20100323

잡담 금지

제목 그대로. 이제 잡담은 어디서고 - 블로그, 트위터 -그만 하려고 결심.

20100321

단상

1. 합리적이라는 말의 효용성을 의심하고, 사실 이런게 학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고, 더구나 현실 경제에 영향을 미친 다는 점에서(가장 정치적 영향력을 많이 미치는 학자군이 주류 경제학자들이 아닐까?) 우려를 넘어서는 불유쾌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세간의 단어를 떠나서.

가끔 자신의 두뇌 활동을 합리적 - 비합리적으로 나눠서 사용하는 사람들을 본다. 예를 들어 어떤 선택을 내릴 때 합리적으로 볼 때는 이렇지만, 비합리적으로 볼 때(점증주의적 관점, 즉 세상살이의 동글동글함을 위해서는)는 이렇게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의 프레임을 말한다.

이런 트레이닝은 매우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두뇌의 뛰어난 점은 곰곰이 생각을 해 나가면서 합리성 + 비합리성을 섞어서 사고를 전개해 나갈 수 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둘을 분리해 사용하는 트레이닝은 은연 중에 그 능력을 마비시킨다.

즉 결론적으로 뭘 대해도 이런 식으로 분리해서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흔히 이성과 감성을 대비시켜 생각한다든가 하는 것도 이런 트레이닝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둘의 체제는 물론 다르고, 논리라든가 인과의 법칙이 적용되는 양상도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한 곳에 특화시키지 않음에서 위대함이 나오는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2.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지 말라고 하지만, 실제로 세상은 부분을 보고 전체를 평가할 수밖에 없는거다. "저 식당 맛없어"라고 할 때 그 식당의 모든 메뉴를 전부 먹어봐야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잖은가. 현실에서는 일부가 모든 것이다"

우연히 본 글이다. 리트윗 된 글을 읽었기 때문에 원래 게시자의 이름은 생략한다. 이 문장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저 식당 맛없어"는 그냥 봐도 알겠지만 일반화가 아니다. "저" 식당으로 명제가 한정되어 있고, "맛없어"라는 가치판단 어구가 들어가 있다. 뒷 부분에 주목해서 말을 넓히자면 이는 일반화된 명제가 아니다.

이건 그냥 한 식당에 대한 판단일 뿐이고, "식당의 모든 메뉴를 전부 먹어봐야..."가 이 판단의 근거이다. 귀납 논리를 전개해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지만, 식당 전반에 대한 일반화를 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맨 마지막은 약간 다르다. "현실에서는 일부가 모든 것이다"는 문장은 선언에 가까운 일반화 명제다. 이 증거로 사용되는 건 앞 문장 전체다. 즉, "맛없는 메뉴 -> 저 식당 맛없어"를 통해서 "현실에서는 일부가 모든 것이다"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다.

이 경우 맨 마지막 문장이 가지는 명제의 근거가 매우 빈약하다. 근거 명제들은 일반화를 시도하기에는 너무나 한정적이고, 단편적이다. 결국 이 논증 전체를 봤을 때 아주 전형적인 일반화의 오류에 빠져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3. 이건 그냥 덧붙여서.

요즘 들어, 맘 터놓고 쉽게 뭔가 이야기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게 꽤나 힘든 일이구나 하고 느끼고 있다. 다들 바쁘기도 하고, 한계 상황이라 그런가 뭐든 버겁다. 세경이는 그래도 잠시나마 행복했을까.

사실 1번의 이야기도 그렇다면 나를 둘로 나눠서 대화를 시도해 보는건 어떨까나 라는 생각을 하다가 그러면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겠구나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다.

참, 이런 이야기나 쓰고 앉았다니.

20100320

칼 폴라니

폴라니가 경제학의 대안이 될 것이다라는 말에는 아직은 동의하지 못한다.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지만 기업의 이익을 보장하는데 주력하는 시장 경제 주의자들의 철벽 수비는 그리 녹녹치 않다.

기업은 학계에 연구 자금을 뿌리고, 학계는 그에 걸맞은 연구 결과들을 보내고, 정치는 이를 든든하게 서포트한다. 결국 인간보다 법인이 우선시 되는 세상이 지금 우리가 맞이한 결과다.

폴라니

<모든 경제 체계가 반드시 의존하게 되어 있는 동기가 굶주림과 이익뿐이라는 이야기는 억지스럽다. 그러한 가정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여러 인간 사회를 두루 관찰해 보면, 굶주림과 이익이 반드시 생산 동기로 작용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설령 그렇게 작용한 경우라 해도 굶주림과 이익은 다른 강력한 동기들과 한데 섞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옳았다. 인간은 경제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이다.

물질적 소유를 획득하는 과정에서도 인간이 노리는 것은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적 선의, 사회적 지위, 사회적 자산 등이다. 인간은 그러한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자신의 소유물의 가치를 평가한다.

인간을 움직이는 동기는 보통 우리가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한 노력과 연결 짓는 혼합적 성격을 띤다. 인간이 생산에 들이는 수고는 사회적 인정을 얻으려는 부산물에 불과하다. 인간의 경제는 일반적으로 사회적 관계 속에 묻어 들어가 있는 것이다.>

20100319

사이트 대시보드

구글 analytics가 말하는 모 블로그의 현실(이글루스가 아니다).

catsgfc

잘 안보이는데 한 달간 방문수 252, 페이지뷰 수 392, 방문당 페이지 수 1.56, 이탈률 84.92%, 평균 사이트에 머문 시간이 46초, 신규 방문수 비율이 404.37%.

이게 뜻하는 바는 거의 대부분 어디에선가 제목을 보고 잠깐 들어왔다가 그냥 나가는 사람들이고, 몇 명은 들어왔다가 나름 열심히 읽어보고 나갔다는 이야기다.

무슨 검색어로 들어왔나 보니 아무래도 리포트라든가 이런 거 쓰려고 검색하다가 잠깐 들어오고, 원하는게 없으니 나가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특이한 검색어는 대구 게이 헬스와 부산 게이 사우나. 이건 뭘까?

어쨋든 가능한 더 모호한 단어를 사용해서 그런 류의 유입을 막아봐야지. (왜? -_-)

 

그러면서 검색어 유입에 득이 될 만한 이야기를 붙인다면

하이킥 결말은 마음에 든다. 우선 김PD가 자신이 생각하는 결말을 끝까지 유지시켰다는 점이 훌륭하다. 예전에도 그래왔지만 이번에는 너무 인기도 많은데다가, 예전보다 인터넷을 통한 인터액션이 훨씬 더 강해졌기 때문에 혹시나 외압에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아무리 드라마라는게 시청자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거라지만 시청자들이 원하는 대로 내용을 바꿔가는 (미니 시리즈 중에 이런 경우가 많다) 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 원하는 대로 되는건 아니라는 사실이 물론 실망을 만들어 낼 수도 있지만, 더 오랜 기억과 감정의 여운을 만든다.

그런 점에서 사전 제작하고(누가 뭐래도 스토리는 못바꾼다), 방영할 때는 스탭진들 모두 외국으로 도망가 있든지, 어디 잠적해 숨어있든지 하는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움직인다. 자고로 작가란 남의 말을 들어서는 안되는 법이다.

인기에 영합해 남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만 들려주다간 제 풀에 넘어진다. 내가 예전에 포스팅을 통해 톰 포드에 대해 투덜거리던 것과 같은 이유다. (그런데 프리다 지아니니 같은 사람이 꽤 잘하고 있어서 기대처럼 구찌는 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러나. 김영민PD의 염세주의는 정말 하늘을 찌른다. 지금까지 그의 시트콤들이 대부분 아주 안좋게 끝났고, 그 이유가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 라고 말한다.

예전에 순풍 산부인과에서 밉상 캐릭터인 박영규가 잘 되고 그런게 기존 관념, 드라마는 권선 징악, 측면에서 참 신경질 날 때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도 김PD는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대답했었다.

그런 아쉬운 결말들이 지나가도 기억 속에 아스라히 남아있는건 그의 재기발랄한 에피소드들인게 또 사실이다. 권오중이 묻어논 비디오 테이프 찾으러 가는 에피소드 같은건 정말 최고였는데. 결말에 좌설하면서도 다음에 또 시작하면 보게 되겠지. (그런데 사실 하이킥은 거의 못봤다 -_-)

이념 논쟁

많은 이들이 이념 논쟁에 짜증을 내고 뭐든 으례 이념 논쟁화해버리는 정치에 짜증을 낸다. 이건 아주 소중한 전략이다. 실상 생활의 양상과 콸러티 등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고 간섭하는게 정치이고, 그것은 투표로 선출되는 정치인이 만들어 낸다. 이 정치라는거에는 현실적으로 큰 이익이 되는 사업들도 잔뜩 껴있고(단적으로 4대강 사업), 현실적 이익 뿐만 아니라 기대적 이익(공교육 혁신으로 순종하는 시민 양성 및 거대 사업 중 하나인 교육 사업에서의 이익)도 포함된다. 그들은 이런 사업들을 통해 이득을 취한다. 이런 이득을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뽑혀야하고, 자신과 같은 정당도 뽑혀야한다. 이 경우 두가지 방법이 있는데 시민들을 설득시켜 당선되는게 있겠고 무관심하에서 지금까지의 탄성으로 당선되는 방법이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이러든 저러든 꾸준한 투표율을 보여주는 계층이 있다면 가능하다.

자, 이런 경우라면 가능한 사람들, 특히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사람들이 관심을 끊게 만드는게 최고 전략이다. 설득보다는 뻘짓이 훨씬 쉽고, 비용도 덜들고, 효과적이다. 반대표보다는 배제되는 표를 만들어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반대표를 내는 사람은 의지가 개입되어야하지만, 안가는 사람은 그냥 가만히 있으면된다. 선거가 아니라 찬반투표일때(예를 들어 개헌) 성공가능성이 높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득을 얻는 자는 찾아가지만, 이득이 없는 자는 가만히 있는다.

언제나, 고대 그리스는 물론이고 지금 여기 서울에도, 정치는 존재하고 그러므로 이념 논쟁은 존재한다. 뭐가 더 나은 대안인가는 언제나 이념이라는 빅 픽쳐에서 나오는 법이고, 그래야만 일관성이 확보되고, 그러므로 예측 가능성을 만들고, 신뢰를 얻을 수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사람들이 많이 하면 지금 여당은 당선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들은 오늘도 뻘짓을 하며 투표율을 낮추는데 주력하고 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훌륭하다 할 수 있겠다.

무심함

텅텅 빈 식당에서 혼자 밥먹는데 건너편에 내쪽을 보고 마주보는 자리에 앉는 인간들은, 역시 빤히 한가한 자리들이 보이는데 굳이 내 옆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앉으려는 인간들은, 텅 비어있는 화장실에서 굳이 내 바로 옆 빈칸을 들어오는 인간들은, 대체 그러는 이유가 뭘까?

변명의 리스트

잘못 쌓여있는 팔로잉 리스트, 알에스에스 리스트, 즐겨찾기 리스트, 이메일의 컨택트 리스트, 전화기의 주소록, 아이튠스의 음악 리스트, 무비 폴더의 영화 리스트, 나름 쟁겨져있는 언더한 세상의 하드코어들, 심지어 캘린더의 약속 리스트들 까지.

이런건 정말로 초기 변화에 따른 민감치가 커서 쌓는데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따져보면 필요없거나, 자극이 안되거나, 즐겁지 못하거나 한 리스트를 제외시키며 만드는 건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에 세심한 주의 따위를 쏟는 에너지를 아까워하는건, 전혀 쓸데없는 또 하나의 소모에 불과할 수도 있겠다.

더불어 이러한 인터액티브한 관계는 자극을 받기 위해선, 자극을 줄 수 있어야 더욱 가능해지는데 능력의 부족이 이 모든 것을 막는다. 깜냥이 모자른다는게 정확한 표현.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뭔가를 들척일 때 좀더 크리에이티브한 자극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하는 이기적인 기대는 멈추질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악화는 양화들과 섞여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 되어가고 있다.

20100315

잘못된 인식

얼마 전에 블로그들을 멍하니 돌아다니다가 살짝 웃기는 이야기를 하나 봤다. 간단히 정리하면 3.1운동은 시작하자마자 폭력 운동이 되었고, 그로 인한 일본군의 피해가 3.1운동 참가자보다 더 컸기 때문에, 진압은 당연한 결과였다는 스토리다.

여기서 나는 두가지를 잘 못 했는데 하나는 이런 이야기를 찬찬히 읽었다는 점이고 - 트래픽을 늘렸다 - 더불어 댓글들도 찬찬히 읽덨다는 점이다. 바쁘고 한정적인 시간 동안 무엇을 읽고, 무엇을 배울 것인가는 굉장히 중요한 선택인데 쓸데 없는 시간을 너무 날려버리고 있다. 넘치는 정보들은 개인적인 제어의 수준을 순식간에 넘어선다. 어려운 일이다.

위 내용에 대해 딱히 반박하거나 할 필요는 없는거 같고, 살짝 언급할 만한 내용이 있다면 다음과 같다. 대부분의 아마츄어 사학자, 혹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다른 분야 전공자들이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는 팩트의 중요성을 너무 과대 평가 한다는 점이다.

팩트는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fact라는 단어와 truth라는 단어가 따로 존재하듯이 둘은 (아마도) 전혀 다른 문제 의식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왜냐하면 팩트는 그것만 가지고는 진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든 저러든 그런 일이 있었다라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사학은 근본적으로 인문학이고, 인문학은 사태를 그런 식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언제나 중요한 점은 사태의 줄거리고 그 팩트가 왜 발생했느냐 이다. 사진은 - 지워지지 않는 - 기록이지만 그것이 곧 역사가 아니다. 이 점은 무척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팩트 주의자들은 곧잘 사태의 전말을 오해하거나, 잘못 파악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통시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획득하는 길은 너무 멀고, 확신할 자신도 없기 때문이다. 자신은 그저 그 순간의 진실을 알고 싶을 뿐이다라고 말하지만 그저 그 순간의 팩트들만을 수집할 뿐이다.

또 하나는 이렇게 만약 팩트를 넘어선 진실을 알아내야 하는게 인문학의 임무라면 그게 가능키나 하겠냐는 회의론이 대두될 수 있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도 그 시대를 잘 모른다. 지금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개연성있게 설명하는 것은 사실 신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인문학은 그것을 알려고 하지만, 다 알게 되리라고 (더 이상은) 믿지 않는다. 그저 접근할 뿐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그런 사람들도 있었지만 인간은 더 이상 그토록 무모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 인터액션 자체는 의미가 있다. 그 정교함을 획득하기 위해 그리고 논리의 체계를 완성시키기 위해 인문학은 존재하고, 그 정교함이 다른 학문의 메타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런 결과 이런 모든 것들은 가설 위에 존재하게 된다. 존재론이 여전히 동작하고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학문은 필연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다. 이 사실을 무시하면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는다. 단지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으니까 변명들이 나올 뿐이다. 이렇게 짜증나는 생각들을 포섭해야 하니 아무도 인문학을 하지 않는 것이다.

20100314

정치성향 자가진단 결과

한겨레 신문측에서 이런 조사를 하길래 한번 해봤다. 혹시나 이 블로그를 가끔 찾아오시는 분들에게 시그널링을 보내는 의미도 있고 해서 일단 올려본다. 자가진단을 위한 사이트 주소는 http://h21bbs.hani.co.kr/politicalcompass/ 

이런 조사에서 "매우 ... 하다"와 "... 하다"를 잘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가진 생각을 완벽히 반영하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간만에 정성스럽게 임해본 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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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결과는 이렇게 나왔다. 위에 점수가 있고 아래 도표의 빨간 점이 그 위치를 반영한 결과인데 저게 뭔가 좀 맞지 않는 자리가 아닌가 싶다. 저거보다 조금 더 아래 쪽이어야 맞을 거 같은데. 0.06차이가 저렇게 큰가.

"좌파-우파"와 "권위 주의-자유 주의"에서 어느걸 더 꺼리느냐 라고 생각하면 어디까지나 내 자신이 반 권위주의적에 더 치우쳐있지 않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상과는 약간 다르게 나왔다.

조사를 다 마치면 우리나라 의원 들 중 누가 어디쯤에 있는가가 대충 나와있는데 나와 비슷한 칸(양쪽 측면 다 -7~-8사이)에 있는 사람은 진중권, 이정희, 문재인이라고 되어 있다.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게(약간씩 느낌의 디테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글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단편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문재인>이정희>진중권 순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다) 살짝 아이러니다.

하지만 일단 조금 복잡한 사정을 담고 있는 국내 정치인들을 제외하고도 저 통계에서 무가베, 베를루스코니 같은 사람이 권위주의 쪽에 올라와 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저 결과의 타당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 둘은 그저 장사꾼, 사기꾼, 독재자, 혹은 돈과 군대를 가진 미친 사람들일 뿐이다.

아직은 머플러를 내려놓을 때가 아니다

여전히 바람은 차갑다. 햇빛이 내려쬐는 곳에는 눈 따위 언제 있었냐는 듯, 심지어 건초들이 뽀송뽀송해지고 흙바닥은 마른 기운을 내보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학동 사거리 가로수 아래에는 군데군데 며칠 전 내린 눈 덩이가 굴러다니고, 건물 뒤 편에는 춥고 긴 겨울이 정말 가긴 가는거냐라는 표정으로 고양이들이 웅크리고 앉아있다. 짧은 며칠이 지나면 그때는 분명 무리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겠지만, 오늘은 그때가 아니다. 천둥과 번개도 다가오고 있다.

20100310

거짓말

기획재정부 장관이 외신 기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그다지 기사가 많지는 않지만 꽤 재밌는 사건이다. 우선 알려진 팩트는 이렇다.

기자 간담회에서 월스트리트 기자가 한국에서 공무원들이 대기업으로부터 룸살롱 접대를 받는데 그에 대한 세금은 어떻게 되냐, 룸살롱 문화 때문에 여성의 사회 진출률이 떨어지는거 아니냐를 물었고, 제지를 받았고, 기자는 욕설을 퍼부었다. 장관은 그런 일 없다,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냐고 대답했다.

기사는 여기에 살이 약간 붙는다. 우리 사회를 잘 모르는 기자가 예의에 어긋나는 얼토당토한 질문을 했고, 그 질문이 한국의 여성을 모욕했다. 욕설은 미국에 20년간 거주했다는 기획재정부 담당 직원이 영화에서나 봤지 실제로는 처음 들어보는 엄청난 욕이었다.

일단 나도 묻고싶다. 장관은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건가? 순진한건가, 무식한건가, 뻔뻔한건가. 룸살롱을 언급한 사람이 여성 권리를 모욕하고 있는걸까, 룸살롱을 이용하는 사람이 여성 권리를 모욕하고 있는걸까.

월스트리트저널에서 기획기사라도 한번 만들었으면한다. 잠복 취재라도해서 세금 탈루 측면에서는 월스트리트저널에 올리고, 이 이상하고 괴팍한 문화에 대해선 폭스 예하 케이블 중에 하나쯤에서 다루면 될듯하다.

실존

철학 공부를 할 때 가장 흥미를 가졌던 분야는 인식론이다. 가장 흥미가 없었던 분야는 (그러므로) 존재론이다. 이런 성향을 가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뻔뻔하고 무지하기 때문이다. 메타 학문에는 관심을 가지면서도 정작 메타 피직스(형이상학)에는 그다지 관심이 안갔다. 이 경우 보통은 구조주의적 성향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지고, 그게 아마 정답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튼 요즘 집에 들어오는 길에 걸으면서 자꾸 실존(實存)을 생각한다. existence. 독일어로 저거 비슷한 건데 정확히는 모르겠다. 키에르케고르가 맞을 거다. 개념적으로 말하자면 단어는 비슷하지만 실재(substance)와는 많이 다르고, 물자체(Ding an sich) 같은 것과도 많이 다르다. 사실 생각해 보면 실존은 인식의 대상도 될 수 없다. 자꾸 이쪽으로 말을 길게 뻗으면 실수, 그것도 결정적이고 치명적이고 쪽팔리는 실수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쯤 하자.

실존. 무엇이 실존하는가. 그리고 그 실존을 인식할 수 있는가. 처음 방법서설을 읽었을 때, 데카르트가 그 답을 분명히 찾았구나 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당연하지만 답 따위는 없다. 증명할 수도 없다. 사실 그게 이 학문의 매력이다. 결정론적 사고, 귀납적 사고로 무장한 채 접근해가지고는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길을 찾을 수 없을거라 믿고 있다.

인식은 자신 안에 구조된 세계다. 그 밖이 있다는 건 짐작은 가지만 잘은 모르겠다. 확신은 못하고 있다. 말이 그렇다는게 아니라 진짜로 그렇다. 그냥 주어진 것들, 정도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이건 믿음의 대상이다. 지금 와서는 그러면 또 뭐하냐, 하고 생각할 때도 가끔 있지만 어릴 적 버릇이란건 잘 지워지지 않는다. 국민학교 때 열심히 다녔던 교회의 설교가 머리 속 어딘가를 떠돌아다니다가 가끔씩 튀어나오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중학교 때 듣는 노래가 무척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가끔 한다. 결코 그때처럼 백지 상태로, 열심히, 집중해서 어떤 음악인가를 듣는 기회는 잘 오지 않는다. 좀 더 나아가면 더욱 즐기게는 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인식의 뿌리까지 깊게 새겨지진 못한다. 그때나 가능하다. 그런 시기이기 때문이다.

어쨋든 실존을 생각한다. 나는 어디에 실존하고 있는가.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그러고보면 듀스는 무척이나 어려운 질문을 던졌었다.

20100308

프레시안 불만

프레시안 뉴스를 RSS에 등록시켜 놓고 보고 있다. 개인적으로 뷰스앤뷰스는 경제 뉴스가 재미있고, 프레시안은 외교 뉴스가 재미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주로 데스크톱(메인 브라우저로 크롬을 쓴다)이나 스마트폰(노키아 6210으로 보통은 오페라 미니 브라우저, 가끔 노키아 기본 브라우저인 사파리 기반의 맵 브라우저) 하지만 이 프레시안 홈페이지는 문제가 많다.

일단 데스크톱에서 대책없는 플래시 광고. 기사 한가운데에 떡 하니 나타나는 플래시 광고는 유명하다. 예전에는 Close 눌러도 닫히질 않는 놈들이 많아 대체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하고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요새는 안 닫히는건 줄어든 편이다. 그렇다고 해도 Close 눌렀는데 조금 있다가 또 나오면 울컥 하게 된다.

스마트폰에서는 조금 더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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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RSS에 포함되어 계속 올라오는 투자 광고. 얼마 투자해서 얼마 버세요 광고가 정말 많이 올라온다. 꼭 이런데까지 포함시켜야 되는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RSS에 저게 올라와있다고 찾아가 읽는 사람이(즉 광고 효과) 몇 명이나 될지도 궁금하다.

그리고 프레시안에서 줄기찬 돈놀이 광고라니. 분명 회사의 수익성이 중요하고, 유지가 중요하니까 이해는 하겠는데 조금 웃기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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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트의 기본 체계를 보면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일단 프레시안 사이트로 가야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RSS는 전문 공개를 하지 않는다.

이게 문제가 아니라 사이트가 워낙 복잡하다보니 원문 보기를 눌렀을 때 기사를 다 읽기까지 시간이 무척이나 오래 걸린다. 내가 RSS로 읽는 사이트 들 중에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건 네이버 블로그 / 카페 말고는 없는거 같다.

또 저 위 그림은 그래도 오페라 미니에서 지원하는 모바일 뷰 보기를 선택해서 저리 나오는거지 풀 뷰로 보면 무척 곤란해진다. 특히 모바일 뷰를 지원하지 않는 노키아 기본 웹 브라우저로 보면 엉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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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식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읽어보려고 해도 절대 제대로 읽을 수 없거니와 한참 쳐다보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럼 그걸 왜 쓰냐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기본적으로 보통의 웹페이지들(뉴욕 타임즈나 BBC같이 접속만 하면 알아서 모바일인지 알아채고 화면 크기까지 맞게 보여주는)은 노키아 브라우저 쪽이 훨씬 잘보이기 때문이다.

 

요새는 개인 블로그도 설치형인 경우 모바일 뷰를 지원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알아서 해상도를 판단하고 알맞게 화면에 뿌려준다. 애플 포럼(여기는 로그인 문제가 있다)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다음이나 네이버 처럼 가로 사이즈를 320으로 고정시켜 놔서 아이폰 아니면 제대로 보이지도 않게 만들어 놓는 파렴치한 짓도 잘 안한다.

프레시안은 모바일도 이글루스와 아마 비슷한 방식이지 않을까 싶은데 SKT 휴대폰으로만 볼 수 있다. 인증을 하고 모바일 뷰를 제공하는 거 보면 위피 기반의 무슨 프로그램으로 만들었나보다. 대체 왜 이렇게 복잡하게들 하는지 이해가 안간다.

물론 언론사 유지를 위해 광고는 중요하다. 특히 프레시안 처럼 유가지 마저 없는 순 웹 기반의 언론사라면 더욱 중요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뉴스를 찾는 독자들 덕분에 사이트가 존재하는데 이렇게 글 읽는거 조차 방해하기 일쑤거나, 낚시성 기사형 광고가 판을 치고 있으면 이거 자꾸 와서 볼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가까지 의심하게 된다.

부디 더 좋은 사이트가 되기 바란다.

20100307

저작권법

http://www.appleforum.com/mac-column/58767-구글과-저작권-그리고-문화접근.html

오래간 만에 읽은, 저작권법에 관한 흥미로운 글이다. 저작권법이라는건 이제 너무 복잡해지고, 그게 어떤 식으로 인정되는지는 판사가 말해 주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게 되버렸다. 법의 원칙 중 하나인 명확성에 어긋나지만 할 수 없다. 너무 많은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일게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아무도, 기존 저작물을 가지고 아무 것도 하지 않든지, 몰래 하든지 수준이 되어버렸다.

책의 경우에는 인용과 주석이라는 제도가 존재한다. 글자는 주인이 없다는 대명제에서 나온 결과일까 아니면 그저 뭐가 뭔지 모르던 옛날에 만들어진 룰이라 그런걸까. 주석을 달면서 원저자에게 연락을 취해 허락을 맡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위 링크의 글을 읽다보면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경우 원저자에게 비용을 지불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주석도 사실 돈으로 환산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쨋든 보통은 따로 비용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인용은 주의해야 할 점이 많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이건 가능하고 인정되는 범위 내에서의 인용일 경우에 해당한다. 하지만 책 안에 포함된 도표나 사진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블로그 링크를 다는게 저작권법에 위배되는가, 또는 위법 여부를 떠나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일까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답을 잘 모르겠다. 신문 같은 경우 직접 링크를 금지하고 있다. 딥링크에 대해 법원에서는 괜찮다고 판결이 있었던거 같은데 내가 잘 모르는 사항이 있는지 요즘도 안된다. 근래 들어 느낀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내가 쓴 블로그 글을 링크 시킬 때 허락을 요하는 댓글을 남기는 경우가 많아 졌다는 점이다. 그런거야 알게 뭐냐, 링크 따위야 맘대로 가져가세요 라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되는 경우들이 많았는지 인터넷의 글쓰는 부분에 오래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은 민감하게 반응하는 듯 하다.

참 어려운 문제다. 과연 저작권법의 부흥이 창작자의 모티베이션을 '얼마나' 자극하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흘러가다가는 오히려 기존 저작물들이 지하에 더 묻혀버리는게 아닐지 싶다. 위 링크의 다큐멘터리들도 그런 꼴이다. 구겐하임 딸이나 되면 몰라도 평범한 사람은 엄두도 못낼 일이다. 다들 저작권 시효가 끝나는 날만을 기다려 풀리고 나면 그걸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활용해 보게 되는 시대가 오게 되는 건 아닌지. 그러면 그 중간에 껴있는 50여년의 텀은 어떻게 되는건지 모르겠다. 물론 완벽히 전무후무한 오리지널이라면 할 말이 없겠지만 그런게 세상에 몇 개나 되려나.

만사, 음색, 포기

1. 다이어리를 쓰게 되면서 펜을 어떻게 가지고 다닐까가 문제가 되었다. 사라사 볼펜을 쓰고 있었는데 너무 커서 다이어리에 들어가지 않는다. 어케어케 검토 후 사라사, 제트스트림, 유니볼, 무인양품 볼펜 등이 공통 규격의 심을 사용한다는 걸 알게 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