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310

실존

철학 공부를 할 때 가장 흥미를 가졌던 분야는 인식론이다. 가장 흥미가 없었던 분야는 (그러므로) 존재론이다. 이런 성향을 가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뻔뻔하고 무지하기 때문이다. 메타 학문에는 관심을 가지면서도 정작 메타 피직스(형이상학)에는 그다지 관심이 안갔다. 이 경우 보통은 구조주의적 성향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지고, 그게 아마 정답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튼 요즘 집에 들어오는 길에 걸으면서 자꾸 실존(實存)을 생각한다. existence. 독일어로 저거 비슷한 건데 정확히는 모르겠다. 키에르케고르가 맞을 거다. 개념적으로 말하자면 단어는 비슷하지만 실재(substance)와는 많이 다르고, 물자체(Ding an sich) 같은 것과도 많이 다르다. 사실 생각해 보면 실존은 인식의 대상도 될 수 없다. 자꾸 이쪽으로 말을 길게 뻗으면 실수, 그것도 결정적이고 치명적이고 쪽팔리는 실수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쯤 하자.

실존. 무엇이 실존하는가. 그리고 그 실존을 인식할 수 있는가. 처음 방법서설을 읽었을 때, 데카르트가 그 답을 분명히 찾았구나 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당연하지만 답 따위는 없다. 증명할 수도 없다. 사실 그게 이 학문의 매력이다. 결정론적 사고, 귀납적 사고로 무장한 채 접근해가지고는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길을 찾을 수 없을거라 믿고 있다.

인식은 자신 안에 구조된 세계다. 그 밖이 있다는 건 짐작은 가지만 잘은 모르겠다. 확신은 못하고 있다. 말이 그렇다는게 아니라 진짜로 그렇다. 그냥 주어진 것들, 정도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이건 믿음의 대상이다. 지금 와서는 그러면 또 뭐하냐, 하고 생각할 때도 가끔 있지만 어릴 적 버릇이란건 잘 지워지지 않는다. 국민학교 때 열심히 다녔던 교회의 설교가 머리 속 어딘가를 떠돌아다니다가 가끔씩 튀어나오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중학교 때 듣는 노래가 무척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가끔 한다. 결코 그때처럼 백지 상태로, 열심히, 집중해서 어떤 음악인가를 듣는 기회는 잘 오지 않는다. 좀 더 나아가면 더욱 즐기게는 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인식의 뿌리까지 깊게 새겨지진 못한다. 그때나 가능하다. 그런 시기이기 때문이다.

어쨋든 실존을 생각한다. 나는 어디에 실존하고 있는가.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그러고보면 듀스는 무척이나 어려운 질문을 던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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