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아마도 힐러리가 될 테고 트럼프가 앞으로 4년간 미국을 소송의 늪에 빠지게 하지 않을까... 여튼 공화당이 트럼프 경선을 막지 못했고 저 나라도 망조가 든 게 틀림없다... 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트럼프가 어떻게 경선을 뚫고 올라올 수 있었는지 좀 더 신중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그리고 어제 아침에 일어나 구글 선거 사이트를 봤더니 플로리다에 빨간 불이 들어와 있었고 아, 이거 뭔가 생각보다 더 크게 망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는 뭐 누구나 다 아는 데로.
12시에 네바다와 아이오와 등지 결과가 업데이트 되는 것까지 보고 클린턴이 이길 수가 없겠구나 라는 현실에 꽤 충격을 받아서 트위터도 거의 하지 않고 청바지를 샀다. 나름 복잡한 경로를 통하긴 했지만 여튼 샀다.
이상한 게 돈은 하나도 없고(저번 달에 형성된 정신적인 바닥이 이번 달의 경제적인 바닥으로 이어지고 있다) 기분은 아주 우울한데 그동안 구천을 찾아 헤매던 옷들이 연속으로 몇 군데 사이트에 등장하고 있다. 어제 밤에도 몇 년 전부터 찾던 게 나름 저렴한 가격에 난데없이 나타났지만 오늘도 역시 돈은 하나도 없고 기분은 여전히 우울한데 뭔가 사고 싶은 열망에 빠져 있고 그러므로 어제 밤부터 계속 나 자신을 어루고 달래고 있다. 이건 일이니까... 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이렇게라도 다짐을 해본다. 슬프지만 그럴 수 없어.
클린턴은 왜 선거에서 졌을까. 이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는데 우선은 최악의 상대를 만난 건 분명하다. 모든 면에서 정말 극명하게 다른 그리고 또한 다른 방향으로 영리하고 간교한 타입의 라이벌이다. 그는 이용할 수 있는 가장 더러운(하지만 또한 효과적인) 수를 다 활용했다. 이런 정도는 아니지만 비슷한 막무가내 타입이 어떻게 선거에서 이기는 지 우리는 이미 경험해 본 적 있다. 대화가 이 정도로 안되고 앞뒤가 안 맞는 인간이라면 현실에선 블록을 해야 하는 데 한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경우라면 이렇게 곤란해 진다.
하지만 이건 결정적인 이유가 아니다. 만약에 다른 남성 정치인이 공화당 후보에 올라왔더라도 아마 트럼프 정도는 아닐지라도 거의 비슷한 노선 - 백인들의 세상, 굿 올드 데이스 - 을 걸었을 거다. 지금 한국에서 볼 수 있듯 여성 그리고 소수자 등 인권 보호에 대해 어떤 종류의 인간들이 가지는 "박탈감"은 아주 이용해 먹기가 좋다. 단편적 사고 판단은 예로부터 아주 좋은 먹이감이었다. 어제 본 건 예컨대 트위터 같은 곳에서 그저 헛소리로 치부하던 사람들의 의견을 표로 바꿔낼 수 있다면 어떤 결과가 만들어 지는가다.
즉 선거 결과를 놓고 봤을 때 이건 트럼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혹은 클린턴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같은 문제가 아니다. 인류는 지금 예상보다 훨씬 전근대적이고 멍청하고 어리숙한 상태다. 세계 곳곳의 우파 혹은 극우파 득세는 어떤 인류가 점점 생각을 하기 싫어하고 이러쿵 저러쿵 하는 이야기도 듣기 싫어하고 그냥 "그래 나는 멍청해!"라는 말을 큰 소리로 외칠 수 있는 미국의 기득권자 = 예컨대 WT, 각 나라마다 그런 게 있다, 가 속이나 편한 사회를 원하고 있다는 의미로 보인다.
즉 남성 혹은 백인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 별 근거도 없는 "선천적" 기득권은 자리 유지를 위해 가장 멍청하면서도 튼튼한 방식 - 우기기와 버티기, 진보를 억제하기를 골랐다. 알다시피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다. 그러니 인류에게 미래 따위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하지만 어차피 갈 길이란 정해져 있는 거고 이건 멍청이들이 들썩거렸던 잠깐의 반작용으로 기억될 거다. 그러므로 이 반동의 크기가 어느 정도가 될 지 생각하며 그 파장을 최소화 하는 게 앞으로 미국의 4년 혹은 8년, 그리고 우리의 1년 그리고 6년 등등에 해야 할 일이다. 그나마 꽤 낫다는 데가 결국 저 정도임을 선거 결과로 보여줬다. 결국 인류가 조금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금 예상보다 훨씬 길고 먼 길을 가야 한다는 의미다. 조금 나아갔다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나아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강력한 영향을 받긴 하지만 어쨌든 저건 미국의 선거였고 여기라면 저 선거 결과에 대한 반응을 어떤 식으로 보이냐로 인간 필터링을 작동할 수 있다. 정치인의 경우는... 뭐 딱히 할 말도 없는 암담 그 자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기존 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심판이라니... 저런 형세 판단을 하고 있는 자들에게 앞으로 어떤 이야기도 듣고 싶지 않다.
2016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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