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15

예컨대 계기

1. 지난한 예이긴 하지만 혜리의 경우를 보자면. 몇 번 이야기했듯이 그 분은 데뷔를 한 2011년을 제외하고(초반 컨셉은 약간 달랐다) 줄창 특유의 애교를 티브이(당시엔 보통 라디오나 케이블티브이였지만)를 시전해 왔지만 일부러 찾아보는 팬을 제외하고 누구도 그 사실을 몰랐고, 2014년 섬씽에 와서야 일반적으로 혜리의 존재가 조금은 인식되었고(그때도 시청률이 낮은 지상파 방송에 나와서 비슷한 애교를 시전해 왔지만 역시 바이럴하진 못했고), 2014년 말에 소위 바이럴한 프로그램에 나와서야 드디어 일반적으로 존재가 인식되어고 아 저 사람이 저런 걸 하는구나 하고 사람들이 알게되었다. 물론 글로벌 관점에서 보면 혹시나 싸이 같은 일이 생기면 또 달라질 것이다. 즉 똑같은 걸 아무리 하고 있어도 사람들이 알게 되는 건 계기가 있어야 하는 거고, 그 계기에 이르러서야 인식의 변화 - 2014년 초와 2014년 말의 차이 - 가 만들어진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인식 변화의 계기는 대부분 사건을 통하고, 아주 가끔 혼자 고행을 하다 이뤄지기도 한다. 인식의 변화는 단순히 인상의 변화를 통하기도 하지만, 역시 아주 가끔은 전반적인 사고 체계의 변화(예컨대 자신의 사고 방식에 대한 반성, 예전에 안 좋아하던 걸 좋아하게 되거나 예전에 좋아하던 걸 안 좋아하게 되는 취향의 변경)를 통하기도 한다. 시도 때도 없이 노출되는 연예인의 경우도 이럴 진데 일반적인 사고 방식은 훨씬 지난한 변화 단계를 거치기 마련이다.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 문득 마련된 판단의 기준이 딱히 별 일이 없다면 끝까지 가기도 하고, 중간에 직간접 경험을 통해 변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의식적으로 자신을 계량하는 경우에나 해당하고 일반적으로는 거의 아무런 변화도 없고, 다가오지 않은 문제에 대한 사고도 하지 않는다. 어쩌다 사회적으로 사건이 발생할 때나 움직이고, 그 때도 대부분의 경우엔 어느 정도의 충격이나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면 방어라는 훨씬 편한 방식을 택하기 마련이다. 존재론 적인 문제는 윤리 문제를 동반하므로 사건의 확률이 높지만, 인식론 적인 문제는 사건 자체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낮으므로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미리하는 사고와 논쟁이 불필요하냐 하면 그건 또 아닌게 혜리가 2011년부터 2013년 말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와 비슷하다. 그 시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도 하고, 엄청나게 유의미하기도 하다. 그 만큼이 있었기에 2014년이 있는 거 아니냐라고 말하기도 그런게 한국에만 수백, 수천의 연예인이나 연예인 지망생이 같은 기간동안 비슷하게 자신의 컨셉을 밀었고 아무 소득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즉 사건에는 우연도 꽤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프레임의 관점이고, 당연히 내용의 측면은 꽤나 다르다는 걸 다시 한번 말해 놓고. 사실 마지막 문장은 불필요한데 가끔 붙여놓게 된다. 2. 어제 우연히 청주와 공주, 세종시와 부여를 잠시 들렀다. 셋다 처음 가본다. 부여는 어렸을 적 가봤을 지도 모르겠는데 기억에 없다. 청주는 꽤 넓었고(도농 복합시가 보통 그렇듯 낮고 넓게 펼쳐진다), 세종시는 꽤 특이했다. 특히 정부 종합 청사는 인상이 매우 없다는 게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그 건물에 대해 좀 더 알아볼 생각이다. 어제 간 곳 중에서는 공주와 부여는 보통 비슷하게 느끼고 있었지만(보통 뭐 백제의 도시, 문화제 많은 곳, 충청도) 상당히 다른 곳이다. 공주는 보다 더 빽빽하고 옛날 동네의 기운이 크고(낡고 다닥다닥), 부여는 공주에 비하지면 약간 더 넓게 땅을 쓰고 있다. 구경이라면 공주가 더 흥미로울 거 같고, 산다면 부여 쪽이 그나마 편할 거 같다. 3. 여튼 굉장히 많은 것들이 무의미하다. 특히 상상의 폭이 지나치게 좁은 자들과의 대화 시간은 더욱 그렇다. 1분을 소비하면 1시간 만큼의 기운이 날아가버린 다는 점에서 매우 조심해야 한다.

댓글 1개:

  1. 일전에 알랭 드 보통이 사회의 하층민을 유럽에서는 예로부터 less fortunate 이라고 불렀으나 미국에서는 loser 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했던 게 떠오릅니다. 노력이란 뭐고 운이란 뭘까요? 참 어려운 문제 같아요. 대부분은 보상받지 못하고 그나마 좋아하는 걸 해야된다고 말하는 당연한 명제가 있는가 하면, 현실에서는 작은 보상이라도 좀비처럼 찾아 헤메야 굶어죽지 않는다는 냉엄함이 기다리는데 말이죠.

    경남에서 나고 20년을 살다 서울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는 저로서는 충청도라는 존재가 마치 지구와 달 사이에 존재하는 빈 우주공간 같아요. 달리는 차안에서 바라보는 논밭 어딘가쯤 이라는 인상밖에 없습니다. 당연하겠지만, 그러고 보니 부여와 공주의 차이 같은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네요. 왠지 충청도에 한 번 쯤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국내여행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요.

    정말 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대화를 시도하면 머리로 생각을 하고 반응을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날이 그래도 따뜻해지고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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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청, 유지, 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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