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슈페어의 기억과 HHhH를 읽으면서 나치를 되짚고 있다. 사실 나치는 히틀러와 괴벨스 이야기만 많이 들어봤지 자세한 내용은 아는 게 거의 없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대충 정리를 해보고 있다. 그런 중에 HHhH에 리디체 마을 학살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짧게 나와 있는 걸 보고 좀 더 찾아봤다. 이 사건에는 인류에 대한 절망과 희망이 동시에 들어 있다.
간단히 사건 요약을 하자면. 하이드리히가 암살을 당하고 게슈타포가 범인을 찾아 나서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그러다가 밀란이라는 남자가 안나라는 여자에게 연애 편지를 보냈는데 그걸 안나가 다니는 공장장이 먼저 받았다. 그걸 읽어보고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게슈타포에 신고한다. 내용은 그냥 연애 편지였는데 뭔가 모호한 여운이 남기게 적혀 있다. 뭐 아무 의도도 없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저 우연이다. 어쨌든 아무 단서나 쥐잡듯이 찾으며 이미 3천 명이나 체포한 게슈타포는 이 편지를 보낸 남자가 사는 곳 리디체를 덮친다. 뭐 엄한 마을 사람들 붙잡고 뭔짓을 해봐야 나올 건 물론 전혀 없다. 히틀러는 아직 살아있는 레지스탕트 조직, 범인을 숨겨주고 있는 체코에 대한 경고로 리디체 마을을 파괴할 것을 명령한다.
1942년 6월, 인구 4백 명 남짓의 리디체 마을은 이렇게 해서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수용소로 끌려가고 임신한 여자 4명은 낙태를 당한다. 이후 공식적으로 192명의 남자, 60명의 여자, 88명의 아이가 살해 당했고, 마을에 불을 지르고 건물은 다 파괴한 다음 포크레인으로 밀어버린다. 히틀러가 이 마을의 존재 자체를 없애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상황을 보면 나치는 독일 내에서 수용소를 운용하고 점령한 체코 등지에서 독재 정치를 하고 있었지만 대외적으로는 국가 사회주의라는 전체 주의를 잘 이행하고 있는 나라로 포장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치가 좋은 점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서구의 인사들도 있었고 국제적으로도 외교 등을 수행하는 데 별 문제가 없는 상태였다.
나치는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학살을 비밀스럽게 처리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리디체에서 있었던 일은 매우 자랑스럽게 대외에 알린다. 이 부분을 잘 모르겠는데 나치 쪽에서 이걸 알리는 게 왜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체코, 그리고 다른 나라들도 떠들면 이렇게 된다...는 걸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소식은 9월 쯤 세계 곳곳에 알려지고 곧바로 각종 연대가 만들어진다. 영국에서는 스토크온트렌트와 스태포드샤이어의 광산 노동자를 중심으로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리디체를 다시 건설하자는 뜻으로 Lidice Shall Live라는 펀드가 만들어진다. 멕시코 시티, 베네수엘라, 브라질 등에는 리디체를 추모하는 뜻으로 마을의 이름을 리디체로 바꾼다. 미국에는 추모 공원이 만들어지고 칠레에서는 나치의 학살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진다. 이집트와 인도는 공식적으로 추모와 연대의 뜻을 전한다.
HHhH에 나온 이야기로는 수많은 예술인들이 작품을 통해 리디체를 알리고 애도하고, 연합군이 투여한 폭탄, 소련군이 쏜 폭탄에 수많은 군인들이 리디체라는 이름을 적는다. 워싱턴에서 해군 보좌관은 "미래 세대가 왜 이번 전쟁에 참여했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리디체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라는 발표를 한다.
즉 체코를 위협하려던 나치 그리고 히틀러는 정치가 아니라 광기를 드러냈고 이 사건으로 그해 말쯤에는 그간 공들여 쌓고 있던 나치의 선전전을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거의 사라진다. 나치는 광기에 휩싸인 인류의 적이 된다.
즉 이 사건은 리디체의 비극임과 동시에 나치의 만행을 세상이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리디체에는 희생을 추모하는 이런 동상이 있다. 이 82명의 아이들은(소년 40명, 소녀 42명) 1942년 여름 폴란드의 헤움노 데스 캠프에서 살해된 1~16세의 아이들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여성 153명과 아이 17명이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위에서 말한 리디체 쉘 라이브 펀드에서 모은 기금으로 마을은 1949년에 원래의 자리에 복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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