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폴 크루그먼과 그렉 맨큐 사이에 블로그에서 소소한 논쟁이 좀 있었다. 부시 행정부의 경제팀과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팀에 대한 평가에 관련된 것이었는데 맨큐가 미국 경제학자 랭킹 이야기를 꺼낸건 약간 웃기지 않았나 싶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발전소'(링크)에 적어놓은게 있다.
사실 이 둘은 논쟁이 붙는 빈도가 상당히 높다. 몇년 전에도 부시 정부의 감세안을 놓고 논쟁이 붙은 적이 있다. 그때 맨큐의 케인지어니즘은 이미 닻을 올리고 딴데로 가고 있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부시 행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점이 영향을 미치고 있을 수도 있다.
어쨋든 인터넷과 블로그의 발달로 유수의 경제학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도)이 가끔씩 아주 소소한 것들가지고도 논쟁이 붙는데, 꽤 거장들의 이런 논쟁을 구경하는건 꽤 재미도 있고 배우게 되는 것도 많기는 하다. 예전에 신문 지상을 통해 이루어졌던 이어령과 김수형의 순수-참여 문학 논쟁을 생각하면 요새는 상당히 스피디하고 관중들의 리액트도 바로 바로 이루어진다.
오늘 모 신문에 이에 대한 기사가 나왔는데 한국 외대 모 교수라는 사람이 이에 대해 설명하면서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들은 자기 이름을 걸고 위기를 진단하기 때문에 미네르바 신드롬 같은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앙일보에서 가끔씩 보이는 이런 식의 전술은 확실히 짜증나는 구석이 있다. 전문은 여기(링크)에서 볼 수 있다.
아주 애매하게 기사를 마무리 짓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문장 자체가 중의적이기 때문이다.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 왜 안일어 나는가를 묻는 것일 수도 있고,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 실명으로 위기를 진단하지 않는건 무책임하다 로 읽힐 수도 있다.
신문 기사가 말하고자 하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측면을 과감히 생략해 버리고 그 인상에 대한 평가는 독자에게 떠넘기고 있다. 조X일보처럼 선동적이거나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식은 아니지만 자신의 기사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트랩을 깔고 있다는 점에서 교묘하다.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우리나라에서는 실명으로 위기에 대해 진단했다가는 아주 골치아픈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는 매우 중요한 팩트를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미없는 비관론이라면 문제가 되겠지만 의미없는 낙관론도 역시 문제다. 어쨋든 그 점을 이 글을 쓴 기자가 간과하고 있는건지, 외대 교수가 간과하고 있는건지도 파악하지 못하게 되어있다.
그 무엇이 되었든 근본주의는 위험하다. 사람이 만든 건 어떤 것이든 오류를 포함하고 있고 그것만 따라가면 되는 유니버설한 완전체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논쟁은 어느 순간이든 중요하고 적어도 발전을 할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기존 사상이 이긴다면 자신의 이론을 더 정교하게 다듬는 계기가 되고, 기존 사상이 진다면 그건 그게 잘못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므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타인의 사상을 억압하고 논쟁 자체를 피하며 그저 우기기에 급급한 사람들이 많고, 이런 사람들이 자신이 근본주의자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가 되었든 예술이 되었든 아니면 어떤 분야가 되었든 사고의 범위를 한정시키는 것처럼 한심한 짓은 없다.
PS) 맨큐와 크루그먼 사이의 논쟁의 핵심은 사실 감세정책과 재정정책 사이에서 어느게 더 지금 이 상황에 효과적일까였다. 맨큐는 감세를 주장했고, 크루그먼은 재정정책을 주장했다. 맨큐가 과연 케인지언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되긴 했는데 이건 개인적인 일이고... 결론적으로 현재 가는 방향을 볼때 맨큐는 바보다-로 끝이 날거 같다. 부디 Your Havard에서 즐겁게 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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