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112

보너스 아미(Bonus Army)

Occupy에 대한 글을 읽다가 후버빌과 보너스 아미에 대한 이야기를 봤다. 후버빌은 대충 아는데(대공황 때 노숙자들이 텐트를 치며 모여 생긴 마을이다, 당시 대통령이자 대공황의 직접 책임자 허버트 후버의 이름을 따서 후버빌이라고 불렸다) 보너스 아미는 처음 잘 모르겠어서 찾아봤다. 대부분의 내용은 위키피디아에서.

 

그러니까 때는 1932년.

17,000명의 일차대전 참여 군인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여타 이와 관련된 시민 단체 등 43,000명이 워싱턴 DC에 모여서 밀린 임금을 내놓으라는 시위가 벌어졌다. 미디어에서는 이를 Bonus March라고 불렀고 또는 Bonus Expeditionary Force라고도 불린다. 시위 캠프가 차려진 곳은 Anacosta 강 주변의 습기차고, 진흙 지대인 후버빌이었다.

이 참전 군인들은 대부분 대공황 기에 직업을 잃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1924년 법에 의해 참전을 했고, 그 법은 보너스 지급을 명시하고 있었다.

퇴역 해병 장군인 Smedley Butler가 이 시위대 캠프를 방문해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7월 28일 후버 대통령의 대책을 기다리던 시위대에게 미군 대변인 William D. Mitchell 장군은 참전 군인들에게 모든 정부 재산을 돌려놓으라고 명령했다. 이 과정에서 워싱턴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이 있었고 두 명의 참전 군인이 다쳤다(후에 사망한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군대에 진압을 명령하고 당일 오후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6대의 탱크로 호위한 보병대와 기병대를 이끌고 찾아가 다 쓸어버리고 불질러 버린다. 참전 군인, 가족들, 시위대가 건물에서 쫓겨나 강가 쪽으로 밀려난다.

후버 대통령은 공격을 멈추라고 지시했지만, 맥아더는 이 시위를 미국 전복을 위한 공산당의 책략이라고 여겨 명령을 거부하고 재공격을 지시한다. 이 과정에서 12주된 어린이 한 명이 최류 가스에 의해 사망하고, 55명이 다치고, 135명이 체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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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군사 작전 동안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되는 아이젠하워도 맥아더의 주니어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나중에 미국을 위해 희생한 참전 군인들을 공격하는 건 잘못된 것이다라고 맥아더에게 말했다고 했지만("I told that dumb son-of-a-bitch not to go down there,"), 후에 맥아더의 행위를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리포트를 쓰게 된다.

후버의 이 작전은 명백히 여론에 안좋은 영향을 미쳤고 1932년 선거에서 루즈벨트에게 패배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대통령 선거 기간동안 루즈벨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공약을 내놓는다.

1933년 5월 시위대들은 다시 모였고, 루즈벨트는 평온한 방법을 선택했다. 버지니아의 캠프사이트에 모여있는 시위대들에게 하루 3식을 제공했고, 협상을 계속한다. 시위대를 범죄자, 혹은 공산주의자로 묘사하는 언론들 속에서 부인 일리너 루즈벨트가 캠프에 방문해 참전 군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만든 노래를 듣고 뭐 그런 걸 한다. 나중에 이 사건은 그럭저럭 잘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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