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904

코멘트에 대한 대답

거대 담론과 구체적 경험.

blogger.com이라는데가 댓글 시스템이 하도 엉망진창이라서 따로 포스팅. 제목의  과감함과 무신경함에 비해 큰 내용이 담길거 같지는 않고, 또 내가 과연 포인트를 제대로 짚고 있는지 망설여지기는 하지만. 사실은 요즘 워낙 생각을 해 본 적이 별로 없고 찰나의 끈만 붙잡고 있기 때문에 이 기회에 브레인스토밍이라도 한번 이라는 욕심이 더 강하다.


1) 동굴의 우상(링크), 담론1(링크)의 생경한 경험에 대한 이야기도 약간 포함.

직접 경험을 통한 치료, subjectivity의 재설정

우선 직접 경험은 그게 물론 가장 소중한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만큼 오해의 가능성도 그만큼 높다고 생각해. 자수성가한 모 대통령이 자기처럼 못하는 사람들을 이해 못하고 무시하는 근래의 세태는 물론이고,

아주 간단하게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여행했는데 강도를 당한다면 강도의 나라로 기억되고 사람들에게 그곳에는 강도가 정말 많고 위험하다 라고 말하고 다닐테고, 호의를 겪는다면 호의의 나라로 기억되고 사람들에게 그곳은 정말 좋은 곳이야 라고 말하고 다니게 되겠지.

즉 같은 곳에서, 또 같은 부분에 대해서 같은 직접 경험을 가지게 될 가능성 자체가 불분명하고 거기에 직접 경험의 인상이라는게 간접 경험에 비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반론에 대해 꽤 격렬히 반항하게 될 가능성이 있지 않나하는 의미야.

말하자면 사고의 과정에서 나오는 안티테제는 콘센서스가 가능할 수도 있는데 직접 경험의 직선적인 경향은 그런걸 어렵게 만든다는 거지. 이런 것들을 좀 더 넓게 생각할 수 있는 관점을 갖추도록 성장하는 것도 어렵고, 사실 모두에게 그런 걸 강요할 수도 없는 거고.


주관의 재설정이라는게 만약 간주간성이나 주관의 객관화, 객관의 주관화를 말하는 거라면 그런 정도의 고도의 훈련된 자아를 가지고 자신을 성장시키려하는게 과연 가능할 것인가 의심스러워. 세상이 너무 진지해 지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거든. 사실 유동하는 정보의 양이 너무 크다는게 현대 사회의 미덕이자 이런 문제의 시작이지.



2) 거대 담론과 구체적 경험

인류학 쪽에서도 그렇고 사실 여러 분야에서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약간 나라마다 학풍도 있는 거 같아. 대륙 철학 계열에서는 아무래도 담론적 습관이 남아있고 영미 쪽에서는 구체적인 걸 원하는 경향이 훨씬 강하고.

여기서 사실 말하고 싶은건 되돌릴 수 없는 경우들이야. 4대강 사업을 하지. 누군가는 그걸 진짜 옳다고 생각해. 누군가는 그걸 진짜 틀렸다고 생각하지. 문제는 논쟁의 끝나기도 전에 일이 시작되었고, 끝나고 나면 되돌릴 수 없다는거야.

나무에 관련해서도 환경 단체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있어. 하나도 안 건드는게 낫다(대체재로 충당하자), 아니면 뽑고 다시 심는걸 의무화하는게 낫다 같은. 어쨋든 자본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에 먼저 치고 나가는게 보통이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는 좀 너무 빠르지 않나 생각해. 결과 중심 주의의 폐혜라고 할까.

예술 쪽에서의 논의는 좀 궁금하고 어떤 식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접해보고 싶다. 알려줄 수 있을까?



결론

역시 머리가 잘 안돌아가고 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네 -_-
그건 그렇고 @sohin. 연락 좀 하게. 보고 싶소. ㅎㅎ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만사, 음색, 포기

1. 다이어리를 쓰게 되면서 펜을 어떻게 가지고 다닐까가 문제가 되었다. 사라사 볼펜을 쓰고 있었는데 너무 커서 다이어리에 들어가지 않는다. 어케어케 검토 후 사라사, 제트스트림, 유니볼, 무인양품 볼펜 등이 공통 규격의 심을 사용한다는 걸 알게 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