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24

벌새

벌새를 봤다. 이 영화는, 특히 한국에서 이런 류의 영화가 가지는 모든 문제점들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예컨대 특수성에 기반한 성장 드라마의 보편화, 하필 중2, 은마 아파트와 대청 중학교, 90년대 중반, 오랫동안 생각해 온 장편 데뷔작, 커다란 몇 개의 사고들. 게다가 이 자전적 드라마는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를 그렇게 극복한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지나치게 자전적이라 팩트와 픽션이 교묘하게 섞여 있다. 누군가는 화면을 보다가 기억 속에서 뭔가를 끄집어 낼 수 있을테고 아주 강한 동질감을 가지게 될 거다. 이런 건 최근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있기도 하다. 나이야 어떻든 비슷한 지형 지물을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문화를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을 치유하고 극복하는 영화는 만들 수 있다. 그렇지만 놀라운 점은 이게 상영 시간이 139분이나 된다는 거다. 괴상하게 놀라운 부분은 몇 군데가 더 있는데 예를 들어 한문 선생이 갑자기 부르는 노래 잘린 손가락으로 마음의 상처와 균열을 치유하는 여중생들이다.

이런 영화에 대고 그때부터 25년이 지난 지금 은마 아파트 가격은 1000%가 올랐다지 방앗간집 아저씨는 건물주가 되었겠네, 같은 이야기는 별로 소용이 없다. 그런 거야 은희는 모르는 사정이고 - 그렇기 때문에 90년대 대치동의 중2가 주인공인 영화는 한국에서 필연적으로 비겁해진다 - 각종 사회적 문제들은 스치듯 지나간다.

그래도 괜찮다. 바깥에서 오는 것들은 이 아파트 단지가 이미 막아주고 있다. 상처들은 오직 가족 내부와 친구와 후배, 남친, 학원 선생 같은 직접적 관계들 사이에서만 온다. 그렇기 때문에 그게 전부여도 상관이 없고 사실 한국 사회에서 지금 이 순간까지 저기서 중학생 시절을 보냈다면 그 이후 무슨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은 한 이런 부분을 극복할 이유도, 필요도 별로 없다.

이건 요 몇 년 간 잘 이해할 수 없는 것 중 하나인 일부 90년대 아파트 키드들의 낡고 예쁜 아파트 감상화를 이해해 볼 수 있는 길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애틋하고 안타까워 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그리워한다. 이 영화는 그 낡고 예쁨을 담는 데 아주 많은 걸 할애하고 있다. 물론 이 영화의 장면들은 굉장히 훌륭하다. 그냥 예쁜 데서 멈추지 않고 과연 더 필요한 화면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걸 담아낸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어땠냐고 하면 재미있었다. 그게 우연이든 뭐든 은희 역을 맡은 박지후는 영화를 찍을 때 마침 닥쳤다는 사춘기와 함께 벌새와 하나가 되었고 이 영화 자체가 되었다. 영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와 모순을 은희는 훌쩍 뛰어 넘어 버렸고 이 작은 영화의 그릇이 지닌 균열을 모두 봉합해 버리고 확 키워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억지를 부린다, 무리를 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밥과 전을 아주 잘 먹는 게 꽤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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