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013

반복되는 루틴

아이디어가 고갈되어간다고 느껴질 때, 계속 루틴만 반복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 머리 속이 아침 산정호수에 짙게 낀 안개 속을 헤매거나,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처럼 아무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도로를 쉬지않고 달리고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이건 체하는 것하고 비슷해 손 써야할 타이밍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다. 뭔가 이상한데라고 생각만 하고 있다가 바야흐로 눈치를 챘을 때는 이미 심각한 상황에 도달해 있다. 이런 멍청한 짓을 계속 반복하는게 인생이라면 인생이다.

이럴때 개과천선을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한다. 내 경험에 의하면 여행이나 산행 같은건 그다지 효과가 좋지 않다. 이런건 머리를 비우거나 기분을 전환시키는데는 도움이 되지만 생각의 전환이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크리에이티브한 느낌의 건물 같은걸 만지고, 보고 오는건 나름 효과가 있었지만 서울 안에 그런 건물들 중 개인 주택이라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는 곳 빼고는 한번 쯤씩 다 돌아본거 같다. 가끔 승효상의 건물 같은걸 다시 보러 가기는 하는데 건물은 역시 살아봐야 더 느껴지는거라 한계가 있기는 하다.

인터넷 같은 경우에는 정보의 보고답게 참으로 다양한 자극들을 얻을 수 있지만 모니터라는 평면의 한계로부터 벗어나기가 힘들다. 나는 촉감에 의한 자극에 민감한지 그런게 없으면 김이 빠진다. 물론 평소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보면서 그럭저럭 자극을 얻지만, 순환의 고리에 빠져버렸을 때는 그저 하나의 루틴한 일과에 머무르게 된다.

물론 가끔 즐겨찾기 해놓은 하시시 팍 등등의 새로운 느낌의 사진가의 사진들을 하나씩 다시 보거나, HHstyle 사이트에서 가구들 사진을 뒤적거리거나, 평소 보던 남의 블로그를 유심히 다시 읽어보면서 뭔가 번뜩이는게 없을까 찾아보려고 할 때도 있다(헬무트랑 코뮤니티할때 하시시가 회원이었는데 인사를 못한 건 조금 아쉽다).

한때는 거의 매년, 어떨 땐 시즌마다, 야간 개장 같은 것도 챙겨가며 서울대공원에 갔었는데 그게 하도 자주 가니까 동물들을 다 알아버려서 재미가 좀 떨어졌다.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는데 커가는 모습을 봐버리니 시큰둥하다. 야간 개장은 조금 재미있었다. 얼마전 대대적인 리뉴얼이 있었는데 예전의 거친 환경이(하나같이 생 시멘트 바닥이었다) 조금 부드러워진 건 마음에 든다.

 

 

경험에 의하면 이럴 때 제일 좋은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거다. 아주 크리에이티브한, 말 몇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며 머리 속이 청량해지는 기분 좋은 느낌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면 더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사람이란건 다 다르고 언제나 새로운 뷰를 만들어주기 때문에 형편없는 인간(특히 편협한 종류의)을 만나는게 아니라면 가치있다.

보고, 느끼고, 만지고 할 수 있으면 더 좋기 때문에 육체나 정신적 유대 관계가 동반된다면 더욱 좋기 때문에 연애가 더 낫고 그게 안되면 컴패니언도 괜찮다. 강연을 듣거나 하는건 인터액티브가 부족해서 그런지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다. . 그 정도 자극이면 찰라의 경험일지라도 몇 년은 뭔가 끄집어낼 수 있다. 모딜리아니나 잭슨 폴락처럼 그거 하나 믿고 끝까지 돌진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어렵다. 좋은 사람을 만나기도 힘들고, 만난다고 관계가 괜찮게 유지될 지도 미지수다. 나같이 어리보기한 사람은 그나마 괜찮은 상황도 망치기 일수다. 그리고 차칫 잘못된 상황으로 접어 들면 10년은 슬럼프에 빠트릴 치명적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사람에 의한 자극은 최고의 경험치를 만들어내고 상호교감이 잘 호응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의지를 가진다고 나오는 결과가 아니다. 치명적일 수 있지만 그만큼 값어치가 있으니 본능의 불나방처럼 불 속에 뛰어들 준비를 한 채 잠자코 기다리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다. 정신적 자극은 커녕 맘편히 만날 제대로 된 친구 하나 만들기 힘든게 세상이기에 어쨋든 이런건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이런 의지가 개입되기 힘든 일 말고 일단 의지가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면 나같은 경우엔 보통 잘 깎여진 스테인리스, 알루미늄, 나무로 된 가구 같은걸 보러 간다. 작고, 정교하고, 묵직하고, 처음 보는거면 좋다. 신기종의 휴대폰도 좋고, 휘슬러의 주방 기기도 좋다. 개인적으로 의자를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백화점이나 삼청동, 가로수길의 큰 상점들, 논현동이나 신당동의 가구거리 같은데를 멍하니 뒤적거리러 간다. 바이킹의 조리 기구나 아크리니아의 싱크대 같은걸 보면 좋겠지만 그런데는 그냥 구경가기엔 눈이 좀 따갑다. 뭐 사러왔냐는 눈초리랑 싸우는 건 좀 귀찮다.

훌륭한 의자가 많은 카페같은데도 좋은데 이런데는 인기가 있는 곳이 많아 혼자가기가 좀 그렇다. 신사동 쪽에 토토(변기 만드는 토토)에서 투자한 카페가 있는데 거기도 좋아한다. 아오야마의 HHStyle 매장처럼 아무 생각없이 여러 의자에 앉아보고, 만지작 거리면서 정말 좋았는데 휘릭 하며 갈 수 있는데가 아니라 슬프다.

 

 

이도 저도 안되면 서점에 간다. 큰 서점. 아무거나 들추고, 끄집어내고, 넘겨보고, 조금 읽어보고, 던져놓고하는 큰 서점. 문방구가 크면 좋다. 책을 사거나 하는건 좋기는 하지만 한권만 열심히 읽게 되서 좀 리버럴하게 이것 저것 생각하고자 하는 의도와는 안맞는거 같다. 이럴때 괜한 집중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

잡지도 좋은데 몇 년전 어떤 사건을 겪은 이후부터 잡지를 사고자 하는 의욕이 사라졌다. 서점에서라도 보면 좋은데 요즘은 다 비닐로 덮여있다. 잡지를 뒤적거리고자 한다면 커피빈이 더 낫다. 여의도에 있는 Zephyr라는 커피 전문점은 잡지 보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다. 반짝이는 새 잡지가 잔뜩 있고, 점심 먹고 커피 마시는 직장인 대상으로 돈 버는 곳이라 저녁 시간대에는 손님도 거의 없다. 대신 일찍 닫는다.

요새 교보문고 같은 경우에는 문구점에 잠깐만 머무르면 점원들이 따라 붙으며 제품의 특징 등을 줄줄줄 말하는 경우가 많아서 좀 걸리적거린다. 이런 방침은 좋지 않다. 마음이 불편하다.

 

 

어쨋든 요즘 이런 상태에 빠져있다는걸 깨닫고 오늘 올레스퀘어에 새로운 휴대폰이라도 만지작거릴 생각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아이폰에 올인하고 있는 근래 KT의 입지를 대변하듯 전시되어있는 거의 모든 스마트폰이 아이폰이었고, 나머지 몇개는 넥서스원이었다.

예전에 갔을 때는 옵티머스도 있고 피쳐폰도 몇가지 있고 그랬는데 다 사라졌다. 아이패드가 4대 있었지만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아이 네명이 달라 붙어 쉬지도 않고 게임을 하고 있었다. 올레패드가 있었지만 내가 건드리자 마자 도난 경보가 울려 직원이 찾아와 경보를 껐다. 잠깐 건드려 본 올레패드는 어딘가 답답했다.

괜히 우중충해져 인사동 맥도날드까지 걸어가 더블 치즈 버거 세트를 먹고 배탈이 나서 가만히 쉬다 이런거나 써본다. 조만간 논현동이나 청담동이라도 가볼까. 논현동 주택가의 배타적이고 을씨년스러운 담장 분위기 좀 좋아하기는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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