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011

무제 또는 자개증, 길어지다

별 쓸데없는 이야기를 잔뜩 쓰다가 지워버렸다. 그리고는 또 쓸데없는 소리를 잔뜩 지껄인다. 이런 이야기를 써놓고 아까워하는 버릇을 고쳐야 하는데 잘 안된다. 그건 일종의 자개증(자폐증의 반대)가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든다.

어쨋든 이 버릇과 마찬가지로 이메일, 문자메시지, 대화에서도 자꾸 그런다. 설레발을 치고, 말을 내려놓고 타이밍이 안맞아 후회하는 일도 많다. 영문도 모른채 그르쳐버린 관계도 몇 개 있다.

그래도 마음에 없는 소리를 내뱉는 성격은 아니라는게 조그만 자랑이다. 누군가에게 힘좀 내라고 말하면 그건 정말 그 순간 그가 힘을 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소리고, 누군가에게 좋은 꿈꾸고 잘자라고 말하면 그건 정말 좋은 꿈을 꿨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한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 마음가짐으로 듣는다.

하지만 이렇게 곧이 곧대로 들으니 말귀를 잘 못알아듣는 경우도 꽤 생긴다. 열심히 듣거나 읽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세상이 그렇게 간단하게 돌아가는지 않는다.

이런 성격으로 좋은 일이라도 있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내내 복잡해지기만 한다. 이런 설레발로 꼬여버린 관계도 많고, 마음에 없는 소리한다고 오해도 받는다. 그런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이런 테크닉은 너무 부족하다. 이게 다 눈치가 너무 부족한 탓이다. 후회가 많지만 돌이킬 방법도 없다. 그리고 왜 사람들은 의심을 하는걸까 고심한다. 참 어려운게 인생이다.

 

기형도의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에 이런 구절이 있다.

"대구는 크고 넓었다. 밝고 우글거렸다. 장정일은 대구는 부산의 절반도 안된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내 고통의 윤곽을 조금 말해 주었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만 마시니 기분이 이상하다고 중얼거렸다."

이제 이 책의 거의 모든 부분이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 버렸지만 이 부분이 항상 머리에 떠돌고 이 문장을 생각할 때 가장 슬프다. 길을 걷다가도, 잠을 자려고 누워있다가도 뜬금없는 순간에 이 구절이 떠오른다. 기형도의 휴가가 시작된게 88년 8월 2일, 대구행 버스를 타고 내려가 밤에 장정일을 만났다. 그리고 89년 3월 7일에 파고다 극장에서 숨졌다.

이 사이의 텀은 7개월이다. 고통의 윤곽. 8월 2일에 말했던 고통의 윤곽이 그를 죽게 만들었을까. 만약 장정일이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지 않았다면 그 죽음은 더 가까워졌을까, 아니면 더 멀어졌을까. 말을 알아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그런걸 바라는게 지나친 일인가 생각을 계속하면 마음만 아프다.

 

몇 달 전부터 가족끼리 어디 바람이나 쐬자라는 말이 오고 갔는데 드디어 다녀왔다. 그리고 동생의 남자 친구가 동행했다. 우연히도 내 대학 1년 후배라고 한다. 동생의 남자 친구가 운전을 했는데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만약 나라면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더구나 찾아간 장흥이라는 곳은 뭐하나 번듯하게 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결국 아주 매운, 조금 특이한 닭도리탕을 먹고 괴상한 공원(장흥 조각공원)에 들어가 차길을 막고 있는 담 바로 옆 잔디 밭에 앉아 과일을 먹었다. 참 어색한 마뜩잖은 자리일텐데 잘 대처하드라. 어쨋든 잘 지냈으면 좋겠다.

참고 1) 그렇게 매운 닭도리탕은 처음 먹어봤는데 사실 좀 맛있었다. 하지만 옆 자리에서 나는 청국장때문에 내심 괴로웠다. 개인적으로 청국장이 메뉴에 있는 집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안들어간다. 물론 오늘은 특별한이었으니 참았다.

참고 2) 닭도리탕은 잘못된 단어이고 닭볶음탕이 표준어다. 그런데 우선 아무리 생각해도 그 요리는 볶음이 아니다. 그리고 조금 더 복잡한 이야기를 하자면 우선 닭은 일본어로 이와토리다. 그리고 새는 토리다. 이런게 좀 합쳐져서 닭 + 도리가 된게 아닌가 싶고 그래서 표준어는 일제 잔재를 배제시키고자 닭도리탕을 비표준어로 규정했다.

하지만 나름의 조사에 의하면 옛날 경상도 사투리에 도리치다라는게 있다. 뭔가 듬성듬성 썰어있는 것에 쓰는 말이다. 만약 어원이 이쪽이라면 닭의 생김새로는 이쪽이 맞다. 어쨋든 닭볶음은 분명 아니다.

그래서 이 요리의 다른 이름이 나오거나 요리의 기원에 대한 추적이 좀 더 이루어질 떄까지 개인적으로 닭도리탕이라는 말을 계속 쓰고 있다. 물론 이게 맞는건 아니니 시험에서 그렇게 적으면 안된다.

그리고 밤에 후배 김군을 만났다. 구렁텅이로 슬렁슬렁 들어가는 동안에 계속 나를 살펴주고 있다. 내 인생에 행운이란게 있다면 그게 참 큰 자리를 차지할거 같다. 참 고맙다.

 

mp3 플레이어를 안가지고 나갔더니 집에 오는 지하철에서 별의 별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었다. 내 앞 7명 의자에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5와 여2이 앉아있었다. 다들 KBS 홀에서 열린 어떤 음악회의 팜플렛을 들고 있었다.

분위기상 남녀 공학이고 그들의 다른 동료들이 뭔가 잘못을 저질렀는데(아마도 땡땡이를 치고 PC방에 간듯) 그게 교감과 학생주임에게 걸린 듯 싶다. 보아하니 앞의 7인도 같이 PC방을 간거 같았고, 그걸 감추기 위해 심각한 얼굴로 20분간 쉬지도 않고 함께 입을 맞추며 알리바이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오른쪽 커플은 (동갑내기 과내 커플, 4학년인듯)

(여) 어제 불꽃 놀이는 왜 한거야 - (남) 세계 불꽃 축제라고 하는거야 - (여) 왜 나한테 가자고 안했어? - (남) ..... - 다른 대화 조금 이어짐 - (여) 벌써 우리 4학년인데 군대는 어떻할거야 - (남) 무슨 대답을 함 - (여) 가족들이 블라블라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10년 후에 이 고민이 생각이 날까. 7명의 고등학생은 아마 잊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커플은 둘이 잘되든 안되든 나중에 대화의 자세한 부분은 기억이 안날지 몰라도, 그런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기억은 가지고 갈 가능성이 클 거 같다.

뭐 이렇게 길어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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