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102

알게 뭐냐

'천국에서'에 대한 이 리뷰(링크)를 읽고 문득 생각나서. 이 소설과 그의 작품에 대해선 소문만 들었지 막상 읽어본 적이 없어서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렇지만 뭐 좀 떠들어 보는 게 약간 소용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1973년의 핀볼에 '라지에이터가 달린 폭스바겐'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가 알려진 건 그의 에세이 집 때문이다. 아래에 내용을 옮겨 보면

- 며칠 전 아키시마 시의 오카무라 씨라는  사람으로부터, 하루키 씨의 소설 중에 '폴크스바겐의  라디에이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이상하지 않느냐는 투서가  모 잡지에 게재된 걸  알고 계십니까, 하는  편지를 받았다. 나는 자동차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사람들한테 물어  보니 분명히 폴크스바겐에는 라디에이터가 없는 듯하다. 영락없는 나의 실수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를 하느냐 하면, 그러기는커녕  웃으며 넘겨 버린다. 왜냐하면 이것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세계에서는 화성인이 하늘을 날아다녀도,  코끼리를 축소하여 손바닥에 올려 놓아도, 폴크스바겐에 라디에이터가  붙어 있어도, 베토벤이 교향곡 11번을 작곡했다 해도, 그건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앗,  그렇구나. 이건 폴크스바겐에  라디에이터가 붙어  있는 세계의 얘기구나!'라고 생각하고 책을 읽어 주면 나는 굉장히 기쁠 것 같다 -

이렇게 되어있다. 이 부분은 꽤 많이 인용되고 활용되었다. 소설은 원래 그런 것이다라든가, 하루키 소설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든가 뭐 그런 식이다. 하지만 이 내용은 바로 이렇게 이어진다.

- 그래도 역시 실수는 자랑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성실한 분들은 가까운 시일 내에 나올  영문판 <핀볼, 1973>에서는 그 부분을 제대로  고쳐 놓았으니까 그  쪽을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보니 책 소개까지  하게 되었다 -

위에서 말하는 영문판은 일본 내수용 영문판이다. 미국용 영문판은 없다고 한다. 아마존에 보면 고단샤 인터내셔널에서 나온 영문판이 있는데 1985년에 나온 걸로 봐서 위에 말한 그 영문판인거 같다(링크). 가격을 보면 알겠지만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럼 일본어 판은 어떻게 됐지 하고 찾아봤는데 고단샤 홈페이지에 보면 2004년 버전이 나와있고 이에 대한 글을 찾아보니 찾아보니 '라지에이터'를 '엔진'으로 고쳐놨다고 한다. 이 부분 말고 수정된 곳은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 어쩌구 저쩌구 했지만 잘못된 건 잘못된 거고 확인이 가능하니 고쳤다는 이야기다. 위 소설은 초기니까 그렇다고 해도(경험이 짜낼 수 있는 건 매우 선명하든지, 아니면 한계가 있다) 본격적으로 전업 소설가로 활동하면서는 팩트 체크를 하는 직원을 따로 두고 있다고 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약간 재미있는 건 우리의 경우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를 하느냐 하면, 그러기는커녕 웃으며 넘겨 버린다"의 '소설가의 호연지기' 쪽이 뒤에는 결국 다 고쳐놨다보다 훨씬 더 잘 알려져있다. 이 이야기는 여기저기에서 활용되고 인용된다.

예를 들어 이 기사(링크)를 보면 위의 폭스바겐의 라지에이터 부분을 하루키 소설의 특징 중 하나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이게 뭔지’ 굳이 생각하지 않자고 말한다. 하지만 위에서 보다시피 핀볼의 실수는 하루키 자신이 다 고쳤고, 이후에도 팩트 체크를 다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말은 전혀 옳지 않다. 다 찾아 고친 수고, 겸언쩍으니 변명이라도 호방하게 해보자며  쓴 에세이, 그리고 이후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고용한 직원 등 저자의 노력을 모두 한 방에 날려버린다.

물론 일부러 없는 것들을 배치하는 소설도 있다. 그건 그것으로써 소설 안에서 기능하기 위함이다. 핀볼의 경우엔 폭스바겐에 라지에이터가 있는 세상이 전혀 필요가 없고, 오히려 시대와 배경의 리얼함을 표방하고 있는 저 소설에 방해가 될 뿐이므로 고쳐진 거다.

하지만 위 링크의 기사 뿐만 아니라 이런 식으로 하루키, 혹은 여타 소설을 대하는 태도 - 뭘 따지고 드냐, 소설이잖아 - 는 종종 보인다. 이 예만 두고 봐도 위에서 말했듯 다 고쳤다가 거의 안 알려져 있어서 막 찾아봐야 했다는 점만 봐도 오히려 그 쪽을 더 선호하는 거 같다.

 

왜냐... 를 생각해 보면 간단히 생각할 수 있는 건 역시 귀찮기 때문이다. 찾아보기도 싫고, 알아보기도 싫고, 폭스바겐에 라지에이터가 있든 말든 '폭스바겐'이라는 말이 주는 이그조틱함과 '라지에이터'라는 말이 주는 어감이 잘 어울리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알게 뭐냐.

리뷰를 가만히 읽어보자면 맨 위 링크의 소설도 그렇다는 거 같다. 이 리뷰에 대한 반응을 몇 개 찾아봤는데 게 중 재미있는 건 '게으른 리뷰'라는 거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앞뒤가 뭔가 이상한 이야기를 다 읽는다는 거 자체가, 게다가 서평으로 쓴다는 거 자체가 굉장히 부지런해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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