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04

Capitalism: A Love Story

골치 아픈 이야기다. 세상을 계급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때, 요즘은 세대간 문제로 치환되는 경향이 있는데(우리나라도 그렇고 유럽, 특히 이태리나 프랑스 같은) 사실 뭐 비슷한 이야기다. 중요한건 누가 생산 수단을 지니고 있고, 누가 거기서 일을 하고 있느냐이니까.

얼마 전에 딴지 일보에 재미있는 기사가 올라온 게 있다. 여기(링크)에 가면 볼 수 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에서 시작해서, 그따위 있지도 않은 나라인데 뭔 맨날 희생만 강요하냐, 집어쳐로 끝난다. 캐피털리즘은 이와는 방향이 다르지만(그는 마지막 화면에서 인터내셔널가를 틀지만, 명백히 인터내셔널리스트가 아니다) 비슷한 류의 이야기가 하나 나온다. 태풍 카트리나에 잠겨있는 집들을 보여주면서 왜 이런 고통을 받는 이들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인가를 묻는다.

딴지도 그렇고, 아래도 그렇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국 비슷한 곳으로 귀결된다. 그들이 다 가져갔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는게 아니다. 기우를 하나 해보자. 마이클 무어는 오바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바마를 당선시킨 사람들에 기대를 걸고 있다. 어쩌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탐욕, 좀 더 좋게 말하면 계급 상승 욕구라는 유인을 가지고 유지되는 체제다. 기본적으로 경마장에서 말 달리는 모습을 보고 있는 잠바입고 담배피는 사람들이나, 매주 로또를 구입하는 사람들, 혹은 정선 카지노에 잔뜩 모여있는 사람들과 같은 생각의 프레임이다. 바로 "혹시나".

이 혹시나는 좀 더 점잖은 방법으로, 하지만 실상은 좀 더 잔인한 방식으로 실제적으로 작동한다. 혹시나를 실현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실력을 쌓고, 누군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돌진을 한다. 전자는 실패할 확률이 높지만(사법시험 합격률을 보라), 후자는 적어도 언더 리그에서라도 승리해 조폭, 혹은 마피아가 될 수 있다. 운이 좀 좋다면 더 좋은게 될 수도 있다. 푸틴 또는 이 사람(링크)

 

미국도 나름 기회가 왔다. 시민들의 권리 의식이 1930년대 시카고에서 파업을 주도하고, 응원하던 때와 비슷하다. 하지만 이럴 때 뭐든 얻어내야 되고, 실질적이고 분명한 진보를 만들어놔야 된다. 우리가 촛불 시위에서 나이브한 태도로 실패하고나자 (말을 하면 알아들을 줄 알았다는 착각이 그 원인이다) 본격적인 진보 진영 말고 그저 소박하게 좀 더 좋은 나라에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패배감, 자괴감에 빠지고 20대의 정치 혐오(거기서 뭘 기대하겠냐 류의) 같은 방식으로 도출되고 있다. 이렇듯 반동이 찾아오면 상당히 길고, 깊다. 우리는 잘 안되서 해메고 있다. 미국이라도 잘 되었으면 좋겠다.

댐이 무너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역시 모티베이션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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