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지리아와의 축구 경기 결과를 아직도 모른다. 손만 까딱하면 알 수 있겠지만, 적어도 하루 정도는 우연히라도 피해갈 수 있다. 그럼에도 뭔가 결과가 좋은가보다하는 건 얼핏 얼핏 멀리서 들리는 단어의 나열로 느낄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후기 철학에서 언어가 의도를 가질 수도 있다고 말했는데, 비목적적인 의도 혹은 파편같은 것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다시금 느낀다. 즉 흐르는 단어의 파편들이 내 인식 속에서, 기존에 가지고 있는 사회 질서에 따라 재편성된다. 입력되는 단어의 수가 한정적이면 오해의 소지가 커지지만 그래도 어떤 종류의 인지를 얻을 수 있다. 심지어 지하철 속의 엠비언스마저 어제 경기의 결과를 암시하는 듯하다. 애써서 읽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사람이 많아질 수록 분명 어떤 기운이 읽힌다. 이런 면은 약간 무섭다. 어쨋든 결과를 몰라서 기분이 좋은가 하면, 딱히 한게 없기 때문에 그렇지도 않다. 어제는 무척 많은 시간을 잤다. 낮에는 계속 졸리다. 벌레들이 계속 나를 문다. 그나마 해가 지고 나면 조금 피치가 오르긴 한다. 오히려 경기 결과를 모른다는 사실이 의도적인 고립과 벽의 두께를 좀 더 커다랗게 실감하게 만드는 구별점 정도가 생겼다.
이에 비해 어제 결과에 아예 관심이 없는, 심지어 그런걸 하는 지도 모르는 일군의 무리들이 서울 어딘가 존재할 것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가지에 몰두하는건 좋은 현상이 아니다. 이어폰이 또 단선되었다. 왠지 너무 슬퍼서 울컥했다. 그래도 이건 꼭 살려야해 싶어서 점심을 먹고 시청역에 갔는데 홍대 입구 역으로 옮겼다는 프린트가 붙어 있었다. 또 울컥했지만 홍대 입구로 가서 얌전히 팔천원을 내고 이어폰을 맡겼다. 기기의 불확실한 미래 앞에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진다. 단선이 아닌거 같아서(잘 보관되어 있었는데 지지직 소리도 없이 갑자기 잠겨버렸다) 걱정이다. 못 고치면 어쩌지.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