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08

유동성의 문제

현 상황을 조금 간단히 모델링 해보자. 유동성 위기의 문제가 어디서 왔느냐가 그 시작이다.

지금 세상에 돈이 모자라서 유동성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다. 부동산 거품과 이와 연결되어 있는 서브 프라임 문제로 은행 등 신용 창조 기관들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고, 그에 따른 위기감으로 시민들이 돈을 회수해 오는 바람에 통화 창조의 양이 줄어들었다. 금융 기관 사이에서도 서로 상대방의 회계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상호 보증이나 대출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문제의 핵심은 이러한 기관의 신뢰에 있다. 또한 이는 지금까지 은행의 규제를 풀어주고 파생 상품 등을 효과적으로 감독하지 못한채 오히려 장려한 규제 당국의 신뢰에도 있다. 정부의 신뢰가 떨어졌기 때문에 지금 위기에 대한 대처 방안에도 사람들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즉 화폐량 자체가 부족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지금의 유동성 위기는 사실 일시적인 현상이다. 대공황 때처럼 유동성의 루트인 화폐 자체가 모자라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 현상은 방치해 놓으면 고착화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각국은 은행과 파생 상품 등 금융 기관에 대한 규제 강화 방안을 찾고 있다. 감독 기관이 은행을 철저히 조사하고 확실히 믿는 다면 예금 전액 보증 같은 정책은 상당한 파급효과가 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현재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금리를 내려 유동성을 확대시키는 일이다. 잠자코 있던 덴마크도 금리를 내렸고, 우리 나라도 두번에 걸쳐 상당히 큰 폭으로 금리를 내렸다.

 

두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은행이 신뢰를 회복했냐는 점이다. 몇 개의 은행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대부분의 은행들은 몸을 바짝 추스리고 다음 분기 실적을 높이기 위해 애쓰고 있다. 기업의 신뢰를 회복시키는 가장 큰 무기는 매출액이다.

언제나 그렇듯 은행의 목표는 국가 경제의 성장이니 이런게 아니다. 자신의 생존이 최우선 과제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은행에 대한 구조 금융 투입, 유동성 확대를 위한 정책들은 매출액을 부풀리도록 만들 수 있는 최상의 수단이다.

암 환자에게 모르핀을 투여했더니 갑자기 웃으며 이야기한다고 암이 사라졌다고 믿는 것과 똑같은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아마도 몇 년쯤 지나면 은행들은 좋았던 이 시기를 돌아보며 더욱 거대화된 자신의 몸집을 뽐내고 있을 것이다. 부실이 제도화되는 수단을 제공하는건 온몸에 수류탄을 감고 다 같이 죽지 않으려면 내 말 들으라고 떠드는 테러범하고 다를게 없다.

 

또 하나가 있다. 유럽, 미국, 일본 등이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함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것으로 현재 예측되고 있다. 즉 전세계의 AD 자체가 줄어든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억지로 유동성을 늘려려는 정책은 리스크가 굉장히 크다. 각국은 지금의 화폐량으로 가능하지만 불충분한 신뢰로 떨어져있는 유동성이 a만큼 있는데, a가 움직이지 않는 다는 이유로 여기에 b의 유동성을 보급하고 있다. 경제 전체의 규모가 줄어들었는데 유동성은 반비례하며 늘고 있다. 그게 가져올 결과는 너무 뻔하다.

결론적으로 a가 움직이게 될 때 과잉 호황을 가져올 것이고, 그때가서 b를 낮추면 불황이 찾아온다. 대개 그렇듯이 경제에 외부 효과가 생기면 과다한 플러스가 생기면 내부를 거기에 맞춰 부풀리게 된다. 이때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하면 상당한 고통이 따르게 된다. 그렇다고 유동성이 확대되기 시작했을때 금리를 인상하며 거기에 찬물을 끼얹을 용감한 행동을 할 기관은 없다.

즉 지금의 유동성 확대는 고통을 뒤로 미루는 행위 밖에 안된다. 시간을 벌어 놓으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지 않겠냐는 바람 정도다. 이건 예전에 은행과 감사 기관, 기업이 서로 윈윈하며 매출을 부풀려 온 과정, 즉 거품을 만드는 과정과 똑같은 일을 되풀이 하는 것이다. 거품이 꺼지기 전에 더 큰 거품을 만드는 건 당장은 매력적이지만 다음에 찾아올 불황의 크기를 더욱 키우게 된다.

 

지금 필요한 건 성급한 금리의 조정, 유동성을 억지로 끌어올리려는 정책들이 아니라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조치들이다. 막혀있는 신용 통로를 회복하기 위해 금융 기관들을 더욱 투명하게 만드는게 당장은 힘들어 보일지 모르고, 지금 정부와 정치인과 친한 척 하는 기업들을 몇 개 무너지게 만들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정작 살아야 할 금융 기관과 더 크게는 이와 연결되어 있는 회사들을 살릴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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