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731

2008년 7월의 교육감 선거

마르크스가 살아있던 시대에는 꽤나 유용했을지 몰라도 세상을 이분법적 도식으로 바라보는건 위험하다. 손쉽긴 하지만 알다시피 세상이 그렇게 간단하게 돌아가고 있지만은 않은게 명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서울의 교육감 선거는 그런 도식이 완전히 무용한건 아니다. 아주 명확한 제로섬 게임의 선거전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의 시민을 크게 두 부류로 자녀들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투자할 수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나눌 수 있다. 비록 지금 자녀가 없다해도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손주들에게 혹은 잠재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분류는 유효하다. 이 두 부류는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사실 현 정권에 대한 찬반의 성향과도 많은 부분 겹쳐있다.

그리고 두명의 후보가 있었다. 한명은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투자할 만한 장을 마련해 주려는 사람이고, 또 한명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불이익을 가능한 덜어주려는 사람이다.

자, 선거가 있었고 결과 집계가 지금 진행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선거는 이미 선거율을 통해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번 선거의 투표율은 1, 2위가 강남구, 서초구로 둘다 19%대다. 그리고 은평구, 금천구, 강북구가 13%대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강북쪽에서 떠오르는 교육 관심구인 노원구가 17%대로 3위고, 송파구가 16%대로 4위다. 목동이 있는 양천구가 15%대로 의외로 낮게 나왔다.

두 집단간의 6%의 차이. 작다고 하면 작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차이가 뜻하는 바는 꽤나 의미 심장하다. 이건, 정치 운동이 하부 계층의 지지를 얻기는 매우 힘들고 - 그럴 시간도, 여력도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 그러므로 대중 운동화 하기 전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려준다. 후쿠모토주의가 범했던 것과 똑같은 실수가 여기서 되풀이 되고 있다.

현 정권이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의지를 확인하는 공감의 자리를 끊임없이 마련하는건 그 자체의 내부 결속을 위해서는 유의미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자랑스러울지는 몰라도 이 문제를 해결할 핵심이 아니다. 좀 더 넓게, 특히 국내 정책들이 작금에 구가하고 있는 '고통의 전가 시스템'이 하부 계층의 삶을 더욱 팍팍하게 만들고 있다는걸 확인시키고 인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만이 우리 사회를 그나마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보다 더욱 더 낮은 계층의 문제들을 더욱 들춰내야 하고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이건 자본주의의 계급 문제와 닿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지금의 상황은 매우 구조적인 문제가 만들어 내고 있다. 대체 왜 니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데 선거하러 나오지 않았냐고 투덜거리고 지나칠 문제가 아니다.

그걸 인식하지 않고서는 이번 교육감 선거와 비정규직 문제가 어떻게 맞닿게 되는지, 누진세 삭감의 문제와 어떻게 맞닿게 되는지 쉽게 깨닫지 못하는 현 구조는 점점 더 고착화 되어간다.

하지만 이건 직접적인 선동이라든가 선전으로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후쿠모토는 지식인 노동자들로부터 아래로의 혁명을 계획했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연대는 너무나 헐거웠고, 정작 직접적으로 계급적인 문제들의 모순을 맞닥트리고 있는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내지 못했었다.

결국 필요한건 멀게만 느껴지는 지금 정부가 펼치는 정책들과 자신과의 연결 고리를 좀 더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작업이다.

지금 선거 결과가 나왔다. 절망적이고, 실망스럽지만 이제 할 일은 분명히 정해졌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는 촛불 시위보다 그것을 알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대의제 민주주의 체계에서는 100만의 군중보다 1표를 행사하는게 더 중요하다는걸 우리는 알아야한다.

1, 2위구가 보여주는 19%의 투표율은, 그리고 그들 구가 저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전국 1위의 투표율을 차지한 지역이었다는 사실은 그 사람들이 요란을 떨지 않고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게 무엇인지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는걸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고 촛불 시위의 의미가 퇴색되는건 아니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광장을 지향하고 그곳에서의 소통을 통해 발전한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궁극적으로 향해야 할 곳이다. 하지만 우리는 마츠리를 위해 그곳에 모인게 아니라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그곳에 모였던것 역시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이 무브먼트는 지금보다 훨씬 더 넓어지고 더 깊어져야한다. 그래야만 아마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될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여당과 20년, 30년 그것보다 더 길게 싸워온 사람들이 이 사회에는 잔뜩 쌓여 있다. 하루 아침에 끝날 싸움은 애초에 아니다.

너무 들뜨지도, 너무 실망하지도 않고 자신의 힘을 명확히 인식하고 하나씩 이뤄나가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다.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아직 샴페인은 이르다. 우리는 오늘의 투표를 이 싸움이 끝날 마지막 순간까지 기억해야 한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20080730

앰네스티 보고서 / 연대를 기대한다

앰네스티의 무이코 조사관이 촛불 시위와 관련된 국내 인권 상황에 대해 조사하고 돌아갔다. 이에 대한 보고서가 몇 장 엠네스티 홈페이지에 올라와있고, 9월에 최종 보고서가 나올 예정이다.

 

1960년, 살라자르의 독재 체제하에 있던 포르투갈에서 두명의 대학생이 술집에서 자유를 위해 건배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영국의 변호사 피터 베넨슨이 이에 대한 기사를 읽고 1961년 옵서버지에 '잊혀진 수인들'이라는 기고문을 내 정부의 탄압에 인권을 빼앗긴 사람들을 위한 행동이 필요함을 밝혔다. 그렇게 앰네스티가 탄생했다.

150여개국에 지부를 두고 있는 앰네스티는 사실 행정 집행력이 있는 기관도 아니고 정부에 직접적으로 압박을 가할 수 있는 기관도 아니다. 그럼에도 앰네스티가 국제 사회의 신뢰를 얻는 이유는 명확한 보고서와 이에 대한 각 지부국들의 호응이다.

호응을 통해 연대를 만들어내고 그럼으로서 힘을 얻는다. 자기랑 별로 관계없어 보일지 모르는 먼 남의 나라 인권을 위한 조그만 행동들이 모여 궁극적으로 자신의 인권을 공권력으로 부터 보호받고 존중받게 된다. 연대는 이렇게 현실이 되고 실질적인 힘을 얻는다.

 

우리나라 정부는 보고서에 대해 앰네스티가 균형잡힌 시각을 보이지 않았다는 지적을 했다. 이건 완전히 잘못된 반응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엠네스티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우리나라 공권력이 말하는 인권이라는게 국제 표준, 즉 세계 인권 선언과 여타의 인권 선언에서 밝힌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대고 균형과 정당한 법집행 운운하는건 애초에 말이 안된다.

콩고는 피그미족을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합법적으로 대량 학살했고, 우간다는 우출루 족을 공권력으로 합법적인 이유를 대며 대량 학살했다. 이 둘은 자기네 나라 법으로는 합법적인 행동을 했을지 몰라도 국제 인권 기준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있어서는 안되는 행동이라고 말하는 거다.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엄연히 우리의 헌법에, 그것도 허가제를 절대 금지한다고까지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부는 집회를 실질적으로 허가제로 운영하고 있고 더구나 공권력의 무력을 동원해 강제로 해산시켰다. 앰네스티가 말하는 것은 이 국내적인 '합법'의 국제적인 '비합법'이다.

 

어쨋든 9월에 보고서가 발표된다. 아직은 어떤 내용이 될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검경의 방해로 구속 수감자들과의 면담도 금지되었고 조사관의 스케줄도 계속 공개되어 제대로 된 조사를 방해받기 때문에 좋은 내용의 보고서는 나오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 우리의 인권을 위해 세계 각국의 정부와 시민들에게 기대를 걸어본다. 우리 나라의 인권 탄압이 비록 잠비아, 수단, 앙골라, 르완다, 동남 아시아의 몇개 국가, 북한과 비교할 만한 수준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나라는 이들과 달리 엄연히 세계 주류 시장에 포섭되어 있는 국가고 그러므로 우리같은 나라에서의 인권 탄압을 크게 다루어야 앞으로 소위 선진국에서 나올 수 있는 인권에 대한 탄압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거라 믿는다.

미영독프 같은 주판알 열심히 두드리는 복잡한 나라들은 일단 제외하더라도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그 무엇보다도 중시한다고 맨날 떠드는 북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시민들이 과연 어떻게 이 문제를 다루고 대처하는지 유심히 지켜볼 생각이다. 실질적인 대안을 우리 정부에서 내놓을 때까지 대사를 소환하든, 우리 물품 불매 운동을 벌이든 열렬히 호응해 주겠다. 절대 가만히 있는 것만은 말아달라.

앰네스티를 통한 연대가 있었기에 우리 세계 시민들은 피노체트에 대해 사법적인 단죄를 할 수 있었다. 승리는 기억일 뿐만 아니라 인권의 가치를 존중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미래여야만 한다.

20080718

개헌 논의

요새 또 개헌에 대한 논의가 등장한다. 사실 5년 단임제, 4년 중임제, 의원 내각제 이런건 자기들한테는 가장 중요한 일일지 몰라도 시민들의 생활하고는 별로 관련이 없다. 제도야 뭘 택하든 권력이 편중되지 않게 균형을 이루도록 하고, 시민들의 의견이 더 잘 반영될 수 있게 헌법이 고쳐지는게 중요한 일이다.

9차 개헌 헌법에 대해 소소한 불만이 많이 있었는데 이왕 바꿀 지도 모르니 생각하고 있는 나름의 마지노선에 대해 이야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국민 소환제, 국민 발안제 도입

-행정부 수장의 국회 해산권 도입

-국회의 행정부 각료 및 수장 해임결의권 도입 / 입법-행정부간 균형

-군인, 군무원 이중 배상 금지 폐지

-공무원, 국영기업체, 공익사업체 노동권 법률 유보 폐지

-국가의 환경 보전 및 관리 의무 강화

-대법원장, 각급 지방법원장 직선제 도입

-검찰의 기소독점권 폐지

-헌법재판소장 직선제 도입

-대법관 수 헌법에 명시

-국가의 인권 보장 의무 도입

-독점 기업의 경제력 남용, 기업의 사회적 의무에 대한 국가의 규제, 조정 기능 강화

-'사형'을 명문으로 제시한 구절 삭제

빠진게 있나 모르겠는데 우선 생각나는 것들만. 이런 논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듯 싶은데, 아무리 양보해도 이 중에 빠지는 내용이 있으면 찬성표 던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20080717

신문을 사다

(폰트 시험 삼아 바꿔봤음. 너무 굴림체 선호인가)
오래간만에 종이 신문을 샀다. 한겨레 신문 2008년 7월 16일자. 나의 종이 신문 구독률은 낮의 빈시간, 지하철 이용률 두 변수의 플러스 함수다. 이 중에 지하철 이용률에 훨씬 많은 가중치가 붙어있다. 그렇지만 집중도와 졸음이라는 마이너스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지하철 오래 탄다고 마냥 올라가는건 아니고 말하자면 역 U자형 함수라고 할 수 있다. 대략 편도 40분 정도의 지하철 Commuter일때 신문 구독률이 극대화 되는거 같다. 대학 4년간을 그랬고 덕분에 한때 항상 한겨레 신문을 가방에 끼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말도 들었다.
오래간만에 신문을 산 이유는 사망설 광고 때문이다. 광고를 내자는 이야기를 슬쩍 봤고, 모금을 한다는 이야기도 슬쩍 봤는데 오늘 아침에 자판기 커피 마시면서 가판에 놓여있던 한겨레 신문에 우와사의 그 광고가 실려있는 모습을 보고 구입했다. 600여명이 성금을 냈고, 한겨레 쪽에서도 조금 할인해 줘서 1면에 실린걸로 알고 있는데 성금을 낸 사람에는 끼지 못했지만 어쨋든 신문은 하나라도 사줘야지 싶었다.
P080716001
이 소문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잘 모르겠다. 당연히 진실이 아닐 수 있다. 인간의 눈이라는건 사실 그다지 신뢰할 만한 도구는 아니다. 머리 속이 훨씬 더 빠르게 움직이고 상상력이 시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이에 대한 실험을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본 적 있는데 자신이 목격한 걸 제대로 기억하는 인간은 한 명도 없었다. 물론 이건 진실일 수도 있다. 아무도 가능성이 0이라고는 말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밝혀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게 어떻게 되었든 단지 어떤 현상을 목격하고, 의심을 하고, 그걸 인터넷에 올렸다고 잡아가는 경찰도, 구속영장을 청구한 검찰도, 구속적부심심사를 기각한 법원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체 무슨 죄목이 적용되는건지 잘 모르겠는데 어쨋든 그 사진을 올린 사람은 지금 구속 수감되어 있고, 경찰과 검찰에 의해 앰네스티 조사관의 면담도 거부당한게 지금의 상황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에 조금 더 붙여본다.

어쨋든 오늘자 신문을 유심히 봤는데 줄줄이 암담한 이야기들 밖에 없다. 뭐, 즐겁고 소소한 일들만 써있으면 팔리는 뉴스는 안될지도 모른다. 노르웨이 신문 아프텐포스텐이 영어판 인터넷 사이트가 있어서 가끔씩 가보는데 거의 매번 첫페이지 톱은 순록이다. 순록이 많이 내려와서 전통있는 스키 대회가 취소되었다느니(스폰서까지 잡은 50년인가 된 대회가 순록 때문에 취소되었단다), 순록 한마리가 활주로에 뛰어들어서 나갈때까지 항공기 운항이 중지되었다느니 그런 이야기들이다. 어제 가봤더니 늑대 여섯마리가 마을에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걸려있었다.
805660h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데 역시 자주가서 보게 되진 않는다. 또 순록이군- 정도의 느낌이랄까. 노르웨이 말은 못읽어서 잘 모르겠는데 사진으로 추측하건데 노르웨이판과 영어판이랑 같을 때도 있고 다를 때도 있고 그렇다. 약간 보수적 성향의 신문으로 알고 있는데 은근 외국인들의 눈을 신경쓰고 있는걸까 싶기도 한데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겠다.

어쨋든 안 좋은 소식만 실려야 팔린다고 해도 이건 너무 암울하다. 1면에는 사망설 광고가 실렸고, 2면에는 접견을 거부당한 앰네스티의 항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3, 4면은 독도 이야기, 5면은 금강산 피살 사건을 둘러싼 북한과의 이야기, 6면은 노무현 자료 반환을 놓고 벌어지는 다툼과 강만수의 서울 법대 사랑 이야기, 8면은 검찰의 고소 권유 이야기, 9면은 기무사 이야기다. 그 이후로는 파니메이와 프레디맥 이야기, 학교 보수공사 부실 시공 이야기 등등등이다.

기무사 이야기는, 어떤 하사가 개인 블로그에 <제국주의론>, <임금노동과 자본>을 인용한 글을 올리고 책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을 소지하고 있는 걸 기무사에서 국보법 위반 혐의로 군 검찰에 송치한 사건이다. 다행히 군 검찰은 아직 이성이 남아있는지 모두 불기소 처분했다. 위의 사망설 구속 사건도 그렇고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나는 생각의 범위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대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제도라는건 사람 잘 살자고 만든 도구다. 그러므로 국가의 목표는 자유 민주주의의 공고화가 아니라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사람들이 잘 사는 나라다. 자유 민주주의는 중간 목표로서 기능할 뿐이다.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완벽한 이론이나 제도 따위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애초에 신이 아닌 이상 오류가 존재하기 마련이고,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그런 오류와 실수를 가능한 줄이는 방법은 가능성의 측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범위를 검토하는 일이다.
그런데 국보법은 중간 목표를 공고화 한답시고 궁극적인 목표로 가는 상상의 범위를 오히려 좁혀 놓고 있다. 목적을 지배해 버리는 수단. 그런게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 그것이 사회주의든, 무정부주의든, 민족주의든, 아니면 국가주의든 다른 이론에 배타적인 근본주의적 경향만 아니라면 모두 포용할 수 있어야한다. 물론 오늘까지는 자본주의와 결합된 대의 민주주의가 최선의 방법이다. 하지만 인간은 어쨋든 발전하고 있으므로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결국 이 때문에 우리는 남들보다 항목이 더 좁은 선택지를 지닐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건 집권 엘리트 층이 체제에 대해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보안법이 가장 먼저 만들어진게 이승만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몰라도 그 다음에는 자신의 정권을 유지시킬 정당성이 없어지니 결국 만들어낸게 보안법이었다. 체제 유지에 자신감이 없고, 그 자신감을 만들어줄 정당성이 없으니 아무대나 같다 붙여도 되는 법을 만들어냈다. 이 법은 그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오고 있다.
나는 왜 이 정권의 주도층이 자신의 이론과 신념에 그토록 자신감이 없이 국보법을 유지시켜 놓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정말로 사회주의 혁명이나 무정부주의자들의 준동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무식한 시민들이 꼬드김 몇 번에 넘어가 혁명론자가 되어 테러를 벌일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설마 그게 겁나는건가? 북한의 존재? 글쎄, 그들이 정말 공산주의자가 맞는지 아닌지가 토론의 대상이 되어버리지도 못하는 지금에 와서 국보법의 존재 따위로 실질적 위험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주사파? 주사파가 과연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걸까. 미국에도 이탈리아에도 프랑스에도 영국에도 심지어 일본에도 반국가주의 단체가 존재한다. 나라가 망했나? 사람들이 집에서 몰로토프 칵테일을 만들면서 폭력 혁명을 준비하고 있나?
이런 점은 소위 음란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보안법처럼, 음란물도 이 이름에 포섭되는 것들이 너무나 많고 자의적 해석이 동반되는 법이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포르노가 합법화되면 사람들이 포르노에 미쳐서 사회가 음탕해 질거라는 생각은 꽤 이상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합법화가 이미 되어 있는 나라들은 어떻게 버티고 있는걸까. 지금껏 20여년 우민화 정책을 추진해온 당사자들은 시민들이 멍청해졌을거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보다시피 그런 일은 안벌어졌다. 애초에 방 구석에 처박혀 그런 거나 볼 놈들은 이미 보고 있으니 별로 상관할 바도 아니다.
또한 이건 예술 분야에서 상상력을 억압하는 도구로도 자리잡고 있다. 예술은 애당초 설득의 과정이 아니라 모티베이션의 과정이다. 사람의 머리 속에 잠재되어있는 어떤 의식들을 의도적으로 끌어올리고 환기시켜 보는게 목표고 그걸 경험하는게 감상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옳음과 틀림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뭐가 끌어올려졌는지, 어떤 감정적 경험을 하게 되었는지에 T와 F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 아 기분나쁘네 F, 아 이건 좀 좋네 T. 이런 식의 점수 매김이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건가? 장정일은 대체 왜 잡혀갔던걸까.
더구나 애초에 그런 류의 정화는 시민들 자신이 경험과 이성으로 이룩해내야 하는 일이지 규제로 이루어질 일이 전혀 아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내가 뭘 보든 대체 왜 국가가 나서서 상관해야 하는지, 그렇게 할 일들이 없는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이런 류의 법안에 대한 반대 의견에 매번 나오는 집권층의 견해는 "아직 시민들의 의식이 성숙하지 않아서...' 운운이다. 아마도 가장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집단이 그 따위 말을 하고 있으니 더 어처구니가 없다.

20080711

돈당 ; 전당 그리고 광당

기존의 좌우파 이론에 기대어 내가 생각하고 있는 정당의 지형도는 다음과 같다. 물론 이건 간주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반증이 나오면 바로 철회하고 조금씩 조금씩 파인 튜닝해가는 임시 거점 가설이다.

더구나 정치란건 재선과 의회 안에 자기 자리 넓히기를 두고 여러 수싸움들과 냉정한 이익 쫓기가 섞여있기 마련이고 그 때문에 상당히 복잡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을 한 곳에 모으고 있다. 그러므로 간판과 메인 스트림에 대한 대체적인 소속 의원과 당원들을 하나하나 생각하면 좀 다른 면을 발견할 수도 있다. 가만 보면 알겠지만 거기가 뭐하는데인지도 모르고 의원된다니까 얼씨구나 껴있는 사람들도 꽤 있다.

일단 가장 우파로는 이회창 당이 아닐까 싶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생각이기는 하지만 일단 안보와 성장률에 최우선을 두고 있고 지금의 여당보다는 조금이나마 더 상식적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적어도 (지금같은) 터무니 없는 짓은 안하지 않을까라는게 지금의 생각, 또는 기대다.

그리고 중도 우파로는 이전 여당이었던 열우당 정도를 생각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고, 반 재벌적이고 시장 친화적이라는 점에서 전형적인 친시장주의 노선이다. 복지 정책에 있어서도 시장 주의가 가지고 있는 한계들을 고스란히 노출시켰다. 부안과 새만금을 보면 생각보다 더 국가주의적이지 않나 싶기는 한데 평균내면 대충 이 정도 아닐까 생각한다.

중도 좌파로는 민노당. 노조뿐만 아니라 농민, 환경, 인권 운동 등의 한두 계열들이 복잡하게 섞여 있어서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기는 하다. 어느 부분에서는 굉장히 우파스러운 면이 있기도 하고(특히 다양성의 포섭이라는 측면에서), 엄연히 노조를 중심으로 엮여진 당이라 이익 집단적인 경향도 무시할 수 없다. 역시 이런 저런 거 다 모아 평균 내보면 이쯤이 아닐까 싶다.

좀 더 좌파로는 진보신당, 그리고 이와 겹치기도 하고 좀더 좌파적이기도 한 사회당도 있는데 선거때 너무 죽을 써놔서 정당으로서 활동 중이라고 말하긴 좀 그렇다.

어쨋든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여러 사건이 닥칠때마다 당의 입장과 소속 의원들의 언급을 보면서 머리 속에 조금씩 미세한 부분들을 튜닝해가며 정치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여당은 뭐냐 하면 내 생각에는 그냥 돈당이다. 돈당. 풀어 쓰자면 錢당 혹은 狂당인데 중의적 의미를 살리기 좋으니 돈당이라고 하자. 문제는 과연 왜 이런 당이 생기게 되었을까(더구나 멤버가 조금씩 바뀌긴 했지만 거의 비슷한 사람들이 광복 이래 거의 모든 시절을 다수당으로 있었다) 하는 점이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일단 현대사가 잘못 시작했다는 점이 크다. 정치적 경륜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그나마 있던 사람들은 미국을 등에 업은 친일 세력에 눌려버렸고)... 이건 상당히 길고 복잡한데다 다들 대충은 아는 내용이니까 생략하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다른 나라에서는 로비스트를 해야 할 것들이 직접 정치에 뛰어들어버렸다. 대부분 나라의 경우 정치라는건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조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거대한 두 축이라 할 수 있는 사용자와 노동자들이 로비스트로 참여해 각종 정책안을 제안하면 정치적 경륜, 정치적 학식, 혹은 정치적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조율을 해 서로에게 무리가 가지 않는 정도의 선에서 균형을 맞춰간다. 선거 결과에 따라 조금씩 좌우로 출렁출렁 거리긴 하지만 어쨋든 한 두번 걸러주기 때문에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건 막아준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로비스트를 해야 될 사람들이 직접 정치판에 뛰어들어버리는 바람에 아무 꺼리낌없이 자기들 입맛에 맞는 정책들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정치적 조율도 없고, 계층적 조화도 없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고려도 되지 않는다. 원래 로비스트들은 그런 식으로 밀어 붙여야 그나마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정치판에서 채택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로비스트들의 극단적인 제안들이 여과없이 정책으로 반영되버리니 펼치는 정책마다 엉망진창이 될 수 밖에 없는게 당연하다. 뭐 밑도 끝도 없이 돈이면 다 되는 노선이라 정치적 스펙트럼이니 이런거 아무 소용도 없다.

더구나 돈당은 주요 노선이 돈이라 세금을 걷어다 생긴 돈을 한 곳에 뭉텅으로 뿌려 개발 이익을 부풀리는 정책을 자주 추진한다. 박정희때 만들어진 이 묘안은 제대로 작동했고 나날이 정교하게 완성되어갔다. 우리나라에선 이거 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고 더구나 세금으로 걷은 남의 돈으로 자기들끼리 잔치하자는 일인데 왜 마다하랴. 니들은 번지르르 펼쳐진 아파트와 도로, 가로수를 보며 선진 조국에 사는거에 감탄이라 하라고.

이 와중에 누군가 눈치 빠른 몇 명은 같이 껴서 이익을 나눠 가지게 된다. 이런 찬란한 투기의 이익史는 신화가 되고, 다음번에는 혹시 나에게.. 라는 기대를 사람들에게 부풀게 만든다. 이렇게 혹시나 하고 달라 붙어있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존재하기 마련이라 이 당은 일단 정권을 잡기만 하면 지지자 재생산에는 문제가 없다. 선진 조국 완성을 위해 대규모 개발만 추진하면 돈도 벌고 지지자들도 덩달아 불어나는데 이것만큼 쉽고 좋은게 어딨냐.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아예 발도 못붙이게 하는거 말고는 방법이 없다.

 

어제 대통령이 국회에서 연설을 했는데 주요한 말 중에 하나가 대의 정치가 위협받고 있다는 거였다. 인터넷 때문에 여론이 여과되지 않고 범람한다나 뭐라나 여튼 그렇단다. 말인 즉슨 옳다. 대의 정치는 위협받고 있다. 하지만 그건 우리만 그런게 아니라 대의 정치를 훨씬 먼저 시작한 서구 선진국들도 마찬가지고 그것도 한 40년 전부터, 좀더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걸로 따지면 한 20년 전부터 대의 정치는 시종 위기였다.

대의 정치에 위기가 온 이유는 시민들의 의식이 이전과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성장했고, 다양한 이익 추구가 등장해 대의 정치로 이 모든 걸 커버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나라들은 대의 정치에 이런 의견들을 반영할 수 있는 직접 민주제 요소를 어떻게 하면 집어넣고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왔다. 그런데 이 나라 수장이라는 분은 대의 정치가 위기니까 대의 정치를 회복(!)하자고 말하고 있다. 잃어버린 10년 어쩌구 하는데, 여당은 한 20년 정도를 통으로 잃어버리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대의 정치 위기에 대한 논의로 나온 것 중에 deliberative democracy라는게 있다. 우리 말로는 보통 심의 민주주의라고 번역하는데 가장 중요한 논거 중 하나가 투표에 의한 잘못된 집단적 선택을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대충 말해서 시민들 간의 끊임없는 의사 소통을 통해 개인들이 자기 선호를 계속 변화시켜 가며 합의된 집단적 의사를 형성하려는 루소적 직접 민주주의의 현대판이자 가능하게 만들어 보려는 버전이다. 롤스의 제자였던 코엔 정도부터 시작된 개념인데 2000년 들어서 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편이다.

심의 민주주의의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디서 많이 들은 이야기다 싶은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 촛불 시위 하는 사람들이, 소통 좀 하라고 정부보고 반 년째 외치고 있는 사람들이 해 왔던 이야기다. 굳이 이론을 들먹이지 않아도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는 자연스레 시민 의식을 저런 방향으로 가게 만든다. 즉, 적어도 대의 민주주의의 측면에서 시민들은 2000년대인데 정부는 1980년대라는건 팩트다.

경제적인 측면, 제도적인 측면에서도 이런 식으로 볼 수 있는 점이 많은데 그렇잖아도 너무 길어져서 일단은 생략한다. 다만 어제 정부가 부동산에 대한 규제 완화를 발표했다. 물가의 폭등을 부동산의 거품으로 잡아보겠다는건 옛날 중국이 말했던 오량캐로 오량캐를 잡는다는 이이제이인가. 참내. 정말 기발하다고 칭찬을 해줘야 하는건가. 아, 돈당 대체 누가 뽑은겨 ㅠㅠ

20080709

순진한 상황 인식

약간의 소회 : 이 블로그에 설치되어있는 구글 어낼러틱스가 여기가 얼마나 마이너한 곳인가 증명한다. 거기다 쓰여있는 글까지 가는 곳없이 길어지니 이야 말로 금상 첨화, 한계 구독률이 0으로 수렴한다. 길게, 길게, 아무도 읽을 엄두가 결코 안나도록 재미없게 길게, 길게.

최선의 결과만을 생각하고 행동하는건 바보같은 짓이다. 물론 최악의 결과만을 생각하고 행동하는것 역시 바보같기는 매한가지다. 지나친 낙관도 지나친 비관도 결과적으로 행동의 준거에 영향을 미친다. 필요없는 실망과 필요없는 환희보다 더 중요한건 앞으로 살아가야할 삶이다. 결국은 두 다리로만 버티며 머리와 손으로 한칸 한칸 나아갈 수 밖에 없는 바로 그 삶.

가끔 뉴스에서 부모가 상속한 엄청난 재산을 두고 어처구니 없게 치사한 싸움을 벌이는 형제 자매에 대한 이야기를 본다. 건실해 보이고 자본도 넉넉한 회사가 월급 얼마 주지도 않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이야기를 본다. 아이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위한 그 복잡 다단한 탈세의 방법들을 본다. 더 필요할 것도 없을 거 같은 자산가가 탈세를 위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별의 별 치사한 수단을 동원하는 모습을 본다.

예의도 없고, 인정머리도 없고, 최소한의 상식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 인터넷 게시판에 어처구니 없는 댓글을 달고, 반대 시위라며 쇠파이프와 각목을 챙겨오는 사람들. 대한 제국때도 있었고, 자유당때도 있었던 그 사람들. 완장을 채워주니 감격에 겨워 다 쓸어버리자고 의기를 다지는 사람들.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싸우고 있다. 우선 그걸 알아야 한다. 촛불 좀 들고 있으면 세상이 확확 변할거라는 나이브한 인식은 정신을 더 옭아맬 뿐이다. 50만이 모였다. 만족한다. 비폭력을 유지했다. 만족한다. 풍자가 가득한 인기 만점의 팻말을 만들어 들고 나갔다. 만족한다. 글쎄, 이 싸움은 그리 간단하게 풀려나갈 문제가 아니다.

이 시위의 시작은 의식의 환기가 아니었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현 시점 그것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과정을 지금의 집권자는 '오해가 풀리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런 사람을 투표로 뽑았다는게 믿겨지지 않지만 유신 헌법도, 짐바브웨의 무가베도, 히틀러도, 부시도 애초에 투표로 결정된 것들이다.

참여의 주최가 20대 대학생들이었으면 그들은 조직할 수 있는 단위가 있고, 함께 할 수 있는 제도가 있고, 세상의 불의와 부정에 반박할 수 있는 전통과 정당성이 있으니 이렇게 나아가진 않았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이 비정규직 문제와 사회적 압박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는 88만원 세대이기 때문이든지, 더 나은 삶 따위는 RATM의 노래나 프랑스 신문에나 나오는 옛날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든지, 아니면 오직 기득권으로 들어가는게 목표지 능력없어서 고생하는 하부 시민들의 인생 따위는 관심없기 때문이어서 그런지 알 수는 없지만 여하튼 그런 일은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물론 개인적으로 참가한 수많은 학생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투표에 의해 선출된 학생회의 결정을 따른다는 (만약 학생회가 나가자고 했어도 우르르 나올거라고도 전혀 믿지 않지만) 대의 민주주의가 무얼 말하는지 아직 나는 잘 모르겠다. 관용에는 폭이 있는 법이다.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전 세계의 현대사는 아픔으로 점철되었고 우파 내에서도 결국 방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한국 거대 기득권이 60년에 학생들의 힘을 본 후 전두환 정권때부터 근 20년간 줄기차게 시도된 조용하고 순종적인 소시민 양성 계획은 이렇듯 성공적이다.

전공투의 투쟁도 68혁명도 실패했다. 하지만 그 이후 프랑스와 일본의 사회는 매우 다르다.

전공투는 애초에 말이 안되는 투쟁이었다. 학내 문제 등에서 출발해 마르크스, 트로츠키, 마오, 제4인터내셔널, 스탈린, 아나키즘 등의 현란한 문구가 난무했지만 이건 말하자면 홍대 클럽 안에 붙어있는 체 게바라의 포스터 같은 그런 시위였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시위대 군중 안에서 헬멧을 쓰고 애타게 자기가 옳다고 생각되는 세상을 만들려고 애쓰던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다수다.

야스다 강당을 점유하고 있던 대학생들을 경찰 기동대가 해산시켜버렸고 그때의 의장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예비학교의 물리 선생님이 되었고, 부의장 이마이 키요시는 사회당 의원으로 출발했다가 탈당하고 지금은 민주당 의원이 되었다. 진압을 하던 경찰 지휘부는 차례대로 4명이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 대학생들이 한때 55만명이 모였는데, 더구나 무력 시위였는데 이루어낸건 아무것도 없었다.

후퇴에 대해선 전혀 생각해놓지 않았던 이 시위는 결국 참여자 모두에게 패배감 만을 안겨주었다. 단카이 세대들은 결국 사회로 속속 들어가 그들이 그토록 비판하던 것들과 똑같은 사람들이 되었다. 그때의 무브먼트는 누군가에게는 대학 시절을 이야기하는 술 안주거리가 되버렸겠지만 그런 세상을 정말 애타게 원했던 순진한 사람들은 상처를 받았다. 고통의 전가. 그게 이 시위의 마지막 모습이다.

68혁명은 이와는 약간 다른 길을 걸었다.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며 드골을 내려앉히기 위해 시위가 시작되었다. 좌익 세력이 중심이었지만 참여한 대다수는 평범한 시민들, 대학생들, 지식인들이었다. 파리 2/3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고, 군사력이 동원되었고 의회가 해산되었다. 드골은 대피까지 했지만 시위는 갑자기 사그라들었다. 시위대의 모습을 보며 주판알을 튀기던 시위에 참가한 몇몇 조직들의 의견은 분열되었고 기만적 전술의 끝에 노동자들은 파업을 철회했다. 시위가 끝나고 이루어진 총선에서 드골은 오히려 승리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원하는 결과물을 얻지는 못했지만 평범한 참여자들이 극한 탄압의 소용돌이를 겪고 난 후 의식이 바뀌었다. 사람들 의식 속에서 권위에 대한 복종이 사라졌고 평등과 인권 그리고 연대가 전면에 나섰다. 진보적인 의식들은 제도들을 하나 하나 바꿔갔다. 물론 지금의 프랑스가 완성된 나라는 아니다. 문제는 여전히 잔뜩 쌓여있다. 하지만 똑같이 68년에 일어났던 이 두 경험이 다른 결론을 만들었다는건 분명하다.

이번 시위가 좁은 의미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겠다. 재협상이라는 메인 타겟이 있는데 이건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좀 더 넓은 관점에서는 아마 더 나은 사회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패배주의를 극복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 가장 큰 변수다. 혹시나 하는 기대 속에 좌파 운동권을 사로 잡고 있는 패배주의, 전대협을 사로 잡고 있는 패배주의, 그리고 60일간 촛불을 든 사람들 머리 위로 언뜻 언뜻 드리워지고 있는 패배주의. 어쨋든 이긴 건 별로 없고, 진건 잔뜩 있는게 우리나라 집회와 시위의 역사다.

하지만, 지금은 물론 조중동 광고 리스트 올렸다고 출국 금지를 당하는 웃기지도 않은 상황이 '잠시' 도래되고 있지만, 20년 전 30년 전과 비교하면 분명 우리는 할 수 있는 말이 더 많아졌고, 할 수 있는 행동도 더 많아졌다. 민주주의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이런 시절은 앞으로 최고로 길어야 5년이다. 이 경험이 잊혀지질 않기를, 조금만 지나면 보나마나 도래할 저들의 기만적 전략들에 굴하지 않기를, 투표의 힘에 대한 시민적 각성이 잊혀지지 않고 계속 지속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좀 더 의견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하면 그때가서 발안제나 소환제를 도입하도록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번 정권은 외교도 못해, 영어도 못해, 컴퓨터도 못해, 경제도 못해, 인권도 못 보호해, 행정은 엉망이야, 지지율도 엉망이고 대체 뭘 잘하는걸까. 평범한 사람들과는 별 관계도 없는 5개 대기업 매출 늘어난거 한가지 있는건가. 역시 삽이나 던져줘야 신명나서 땅 파댈려나.


20080703

1999년 시애틀의 교훈

1999년 시애틀의 시위와 2008년 우리나라 시위는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일단 1999년 시애틀 이야기부터.

1999년 시위의 목적은 알다시피 시애틀에서 열리는 WTO회의를 무산시키는 것. 이를 위해 목적을 달리하는 여러 단체가 한데 모여서 오직 한가지 목표 회의의 무산을 위해 시위를 시작했다. 외부인이 약 5만명 정도가 시애틀에 모였다. 어쨋든 시위가 시작되었고 도로를 점거한 시위대는 회의장을 둘러싸고 회의국의 입장을 막았다.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데 센터를 경호하던 경찰 병력 일부가 시위대 내부에 고립되버렸다.

결국 시애틀 경찰은 고립된 경찰 병력을 구하고 회담장 안에 이미 들어가있던 사람들을 구해내기 위해 강경 진압을 선택한다. 최류탄, 고무탄 등이 사용된 강경 진압과 체포는 하지만 시위를 더욱 격화시켜버린다. 특히 요새 국제 규모의 시위에 항상 등장하는 무정부주의 단체 블랙 블록이 방화 등의 과격 시위를 시도하는데 그렇다해도 이 시위 역시 비폭력(자기 방어를 위한 바리케이트, 물리적 저항 수준의) 기반이라 시위대에서의 자체 제어에 나름 성공한다.

비록 야간 통행 금지와 도시 전역에 비상 경계령이 선포되고 시위 금지 구역이 설정되었지만 밤사이에 과격한 충돌은 자제되었다. 어쨋든 이런 시위를 통해 WTO 회의를 무산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진압의 결과로 경찰 서장은 해임되고 다음해 시애틀 시장도 낙선한다. 그리고 법정 투쟁에 들어가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시위 금지 구역 바깥에서 체포된 157명에게는 불법 체포를 이유로 25만불을 배상해준다. 그리고 2007년 시위 금지 구역 내의 (바깥이 아니라 금지 구역 안이다) 공원에 모여 노래를 부르며 연좌 농성을 벌이다 체포된 175명에게 납득할 만한 이유나 확실한 증거 없는 불법 체포였다는 이유로 100만불을 배상하고 체포 기록도 삭제되었다. 뒤의 판례는 법원에서 경찰의 진압 자체가 수정 헌법 4조의 위반이라는 판결을 받는데 사실 100만불 배상은 시애틀 정부가 가입한 보험 회사와 시위대 간의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고 시애틀 정부는 항소를 포기한다.

가끔 미국은 폴리스 라인 설정해 놓고 넘어오면 다 때려 잡는다느니 발포해 버린다느니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도 때에 따라서다. 그게 가능하려면 현실된 위협의 존재와 그걸 증명하는게 매우 중요하다. 가난한 시위대나 반항자(특히 흑인이나 히스패닉, 그리고 아시안)들이 별 이유 없이 총 맞고, 그러고도 경찰에게 무죄가 나와버리는 이유 중 하나는 어설픈 변호사와 부족한 증거 확보라는 점도 있다. 시애틀 정부도 물론 이런 서류 작업의 미비 때문에 패배했고, 그걸 아쉬워했다.

결국 시위대와 경찰 및 정부 양쪽 다 증거의 확보가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경찰 중대장이 횡단 보도 막고 '내 맘이다' 따위의 대답을 하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어쨋든 이외에도 다른 몇차례 소송에서 시애틀 정부는 80만불 정도를 더 배상했다.

미국이 개인의 권리를 소송에 의해 보장하며 유지하고 있는 나라라는건 확실해 보인다. 돈이면 하여튼 다 되는걸 보면(변호사 마련도, 증거 확보도 다 돈이다) 웃기는 나라인거 같기도 하고, 적어도 그 시스템 안에서는 돈만 있다면야 완벽한 나라인거 같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소고기 반대 시위 역시 소고기 재협상이라는 단일 목표를 이루어내기 위해 나가고 있다. 정치적 관심이 덜한(즉 뚜렷한 노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시민들이 주도한 덕분에 반 FTA나, 반 신자유주의 등의 문제로 확대시키지 않을 수 있었고 한국내 우파 중 소수와 좌파 단체들이 참여하면서 확대 일로를 걷게 되었다. 참여한 단체가 천개가 넘는데 사실 주도하고 있는건 정치적 단체들은 아니고 무소속자 또는 생활 관련 단체들이다.

시위의 본진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 조직에서는 비조직 노동자라고 지칭했던데 이건 좀 이상한 이야기다. 물론 허위 의식이라고 설명하면 비조직 노동자가 맞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론적으로는 편하고 손쉬운 설명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측면이고 현 시점을 전혀 설명해내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라 생각된다. 지금에 와서 논의의 폭이 조금씩 넓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자본주의의 모순을 노동자 관점에서 깨닫고 시작한 시위가 아니다.

만약 비조직 노동자가 맞다면 기륭 전자나 이랜드, KTX 노조에 대한 무관심(아주 약간 관심이 늘고는 있다)을 어떻게 설명할 건가. 아무리 의식 수준이 낮다고 해도 3달이 지나는 동안 관심이 많이 가지 않는다는건 이상하지 않나.

기존 좌파(서구에서는 신좌파의 등장으로 구좌파로 불리는) 쪽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 제도에 속하는 자들의 당위로서 참여할 지는 몰라도 정치적 확대의 측면에서는 전혀 지지를 못 얻고 있다. 시위 현장에서 진보 신당은 대환영을 받지만 여전히 지지율은 10%에 못미친다. 노회찬 말대로 이건 서포터로 인식하고는 있지만 대안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다는 증거다.

노조 역시 노동자 의식을 투철히 쌓아나가는데 설령 성공했을지는 몰라도, 연대에 의해 쟁취되는 민주주의 의식을 투철히 쌓아나가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의 침묵 상황은 앞으로 노조에게도 무거운 짐이 될 수 있다. 2달을 이어온 촛불 시위에 대한 응답이 2시간 파업이라니, 이에 과연 누가 환호와 지지를 보낼 것인가. 평범한 시민들은 임금 몇퍼센트, 복지 수당 몇퍼센트 때문에 얼마나 오랫동안 열심히 투쟁을 했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애초에, 자신들의 활동의 정당성과 지지를 부여받을 수 있는(뭐 역사적 이론적 정당성 운운하면 할 말 없지만) 이런 기회를 날려먹는건 전혀 전략적이지 못하다. 지금까지 시민들의 별다른 지지 없이도 잘만 성공해 왔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위험한 발상이다. 부메랑은 언제나 뱅뱅 돌며 날아다니고 있고, 다음엔 누구의 목을 치기 위해 날아올지 모른다.

임금 투쟁은 너무 현실적이라 시민들의 외면을 받을 수 있고, 여전히 남아있는 노동자의 세상 운운은 너무 비현실적이라 시민들의 외면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좌파 입장에서는 이 시위에 대해 별 다른 대안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가질 수 있는 저력도 부족하지 않나 싶다. 그게 좀 안타깝다.

어쨋든 이런 주체와 참여자라는 점에서 국내적 연대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국제적 연대와 관심을 얻는데에는 실패했다(기 보다는 시도도 안하고 있다, 이게 반 FTA로도 잘 안 나간다).

이건 우리 관점으로는 절차의 문제, 정부의 기망 문제, 국내 민주주의 문제, 크게는 대의 민주주의의 미래 등등이 섞여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이슈다. 하지만 소고기 수입 문제 때문에 몇십 만명이 모여 시위를 하고, 또 저렇게 강경하게 진압을 한다는건 외국인들에게는 거의 해프닝으로 보이기 쉽다. 물론, 이건 이 시위를 소고기 수입 반대로 한정시켜서 보도하고 있는 외신의 문제이기도 한데, 이들이 한국 사회를 그렇게 잘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순 없기 때문에 제대로 설명하기는 조금 난감한 문제다.

어쨋든 시애틀과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도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인해 시위도 강경한 노선으로 흐르던 와중이었는데 사제단 등 종교계의 개입으로 일단 현재 관점에서 진정된 상태다.

그러나 이 시위가 계속된지 3개월째인데 6개월 전의 우리나라 상황과 비교해보자. 결론적으로 소고기의 검역권은 더 약화되었고, 그때도 대운하는 보류였는데 지금은 약간 더 강한 의미에서 보류 상태다. 정부 말로는 수도, 전기 민영화 계획은 없었고 다른 공기업 민영화 계획만 있었다고 하니 그것도 바뀐건 없다. 결국 3개월의 시위 동안 얻은건 거의 없는 상태다. 청와대 비서진들 교체가 유일한 성과지만 그게 그거인 상태에서 별 의미도 없다.

이 다음부터가 문제다. 과연 정부가 말을 들을까? 만약 안듣는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일단은 위 시애틀의 예처럼 경찰의 불법 행위에 대한 손해 배상이나 절차법 위반 사항에 대한 고소는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통해 경찰 간부급의 불법 행위를 처벌할 수 있어야 시민들이 불법적으로 당한 고통을 조금이나마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다. 법원이 과연 들어줄까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권양숙 사건 에서도 87년 시위가 시민들의 잠정적 승리로 끝나고 나서야 재정 신청을 받아준 놈들이다) 그래도 일단 제도권 내에서 중요한 루트다.

정치적으로가 문제인데 선거는 너무 멀리있고 소환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탄핵 제도가 존재하기는 하는데 의석수 상 국회에서 통과될 리가 없다. 헌법이 대통령과 국회 의원의 임기를 보장하고 있지는 않으므로 (물론 이거엔 법적인 논란이 있겠지만) 국회 의원을 소환시키는 법이라도 만들면 좋겠지만 역시 발안권도 없다.

헌법을 개정시키면 가능하겠지만 이게 또 국회 다수(그것도 아주 많이)를 한나라당이 점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려운 일이다. 헌법 개정안 발안권도 시민들에겐 없다. 그리고 시민들이 원하는 헌법 개정안이 마련되지 않을 것이고, 한나라당이 원하는 헌법 개정안은 시민들이 통과시켜주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이야 할 수 없다 쳐도 여당과 (합체할 가능성이 있는) 그 비슷한 당을 국회에 너무 많이 뽑아준 결과가 역시 나타나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이니 어쩌니 하는데 사실 대통령의 국회 해산권이 없고, 국회의 대통령 탄핵권이 있는 우리 헌법은 국회 2/3를 차지하고 있는 정당이 폭주할 경우 이를 막을 방법이 전혀 마련되어있지 않다.

지자체장들을 소환시켜 간접적으로 국회와 행정부를 압박하는 방법도 있는데 이건 너무나 번거롭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데다가 이루기도 어렵다.

과연 어떤 방법이 있을까. 목표는 시애틀처럼 간단 명료한데 이루어낼 수 있는 방법이 뚜렷하지가 못하다. 시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관념과 지식이 높아지고 연대에 대한 확신이 높아지는 것들 다 좋다. 하지만 결과를 꼭 얻고 싶다. 특히 절차상의 문제를 이렇게 지나쳐 버리면 이건 5년 내내 반복될 거다. 현 정부가 조금이라도 의견을 듣고 협상이라도 하면 좋겠는데 전혀 안 들을거 같다는게 문제를 참으로 어렵게 만든다. 무슨 방법이 있을까 과연.

절차, 평화, 부활

1. 국회 경고를 위해 군대를 동원하는 게 대통령의 통치 행위라는 생각이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 심지어 이게 국힘의 대통령 옹호, 탄핵 반대 논리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 정말 엉망진창이다. 아무튼 국회 표결에서 204표가 나와서 탄핵이 의결되었고 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