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623

시간

나이지리아와의 축구 경기 결과를 아직도 모른다. 손만 까딱하면 알 수 있겠지만, 적어도 하루 정도는 우연히라도 피해갈 수 있다. 그럼에도 뭔가 결과가 좋은가보다하는 건 얼핏 얼핏 멀리서 들리는 단어의 나열로 느낄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후기 철학에서 언어가 의도를 가질 수도 있다고 말했는데, 비목적적인 의도 혹은 파편같은 것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다시금 느낀다. 즉 흐르는 단어의 파편들이 내 인식 속에서, 기존에 가지고 있는 사회 질서에 따라 재편성된다. 입력되는 단어의 수가 한정적이면 오해의 소지가 커지지만 그래도 어떤 종류의 인지를 얻을 수 있다. 심지어 지하철 속의 엠비언스마저 어제 경기의 결과를 암시하는 듯하다. 애써서 읽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사람이 많아질 수록 분명 어떤 기운이 읽힌다. 이런 면은 약간 무섭다. 어쨋든 결과를 몰라서 기분이 좋은가 하면, 딱히 한게 없기 때문에 그렇지도 않다. 어제는 무척 많은 시간을 잤다. 낮에는 계속 졸리다. 벌레들이 계속 나를 문다. 그나마 해가 지고 나면 조금 피치가 오르긴 한다. 오히려 경기 결과를 모른다는 사실이 의도적인 고립과 벽의 두께를 좀 더 커다랗게 실감하게 만드는 구별점 정도가 생겼다.

이에 비해 어제 결과에 아예 관심이 없는, 심지어 그런걸 하는 지도 모르는 일군의 무리들이 서울 어딘가 존재할 것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가지에 몰두하는건 좋은 현상이 아니다. 이어폰이 또 단선되었다. 왠지 너무 슬퍼서 울컥했다. 그래도 이건 꼭 살려야해 싶어서 점심을 먹고 시청역에 갔는데 홍대 입구 역으로 옮겼다는 프린트가 붙어 있었다. 또 울컥했지만 홍대 입구로 가서 얌전히 팔천원을 내고 이어폰을 맡겼다. 기기의 불확실한 미래 앞에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진다. 단선이 아닌거 같아서(잘 보관되어 있었는데 지지직 소리도 없이 갑자기 잠겨버렸다) 걱정이다. 못 고치면 어쩌지.

20100620

엔드 오브 더블류 씨

시간이 흘러감을 느끼게 해주는 지표들 중에 알에스에스가 쌓이는 광경은 꽤 유용하다. 세상은 뭔가 하고들 있구나하는 실감이 난다. 날짜도 요일도 별 효용이 없으니 잘 와닿지가 않고, 날씨도 그저 변화무쌍하기 만하니 어제도 내일같고 오늘도 저번주같다. 지금은 무척 덥다. 땀이 많이 흐르고, 발에는 굳은살과 염증이 생겼고, 살도 꽤 타버렸다. 언젠가부터 땀이 참 많이 나는 인간이 되었다. 싫다. 습도가 높은 것도 견디기 힘들다. 그래도 지금 앉아 있는 곳은(계단이 있고, 건물과 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한적하다) 바람이 좀 분다. 생각해보니 월드컵과 화장실의 이니셜이 같다. 더블류씨. 새벽에 깨나서 물을 마시고 더블류씨를 다녀와 멍하니 앉아 있다가 컴퓨터를 켜보니 덴마크 대 카메룬의 경기를 하고 있었다. 졸면서 오분 쯤 보다보니 왠지 한심해져서 올해 더블류씨는 이쯤에서 마감하기로 했다. 어제 김군이랑 더블류씨의 재밌는 점과 한심한 점에 대해 이와 비슷한 애티튜드의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영향도 조금 있다. 사실 어제밤에 동해를 갈까 의기투합을 잠시 했었는데 관뒀다. 두명의 피폐한 영혼의 탕진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그냥 나온건 아니고 우결에서 서현 커플이 정동진에 가길래 그럼 우리도~ 뭐 이 정도다. 테레비라는건 참으로 영향력이 크다. 어쨋든 어딜 멀리 간다면 혼자 가든지, 모르는 사람과 가고 싶다. 입을 다물든지, 굉장히 어색하든지. 불편한 와중의 한 가운데 놓으면 꽤 재밌을거 같다. 최형에게 축의금을 보내고 메일을 보냈다. 그 사람이 지금 어느 시간대에 있는지 감이 안잡힌다. 여튼 나를 챙겨주고 있는 정말 몇 안되는 사람인데 미안하다. 이해해 줄거라고 믿으니 더 미안하다. 도르가바의 20주년 패션쇼를 잠깐 봤고 역순으로 햄버거, 토스트, 자장면, 햄버거, 칼국수, 만두, 라면, 짬뽕, 햄버거를 먹었다. 그 앞은 생각이 안난다. 글자가 많이 차오르니 휴대폰이 심각하게 느려지는구나. 그만하자.

20100615

수경 스님

요즘은 내 바깥에 세상 따위는 없다라는 기분으로 살고 싶다. 처지도 갑갑하고, 갈 곳도 없다. 그럼에도 가끔씩 들춰보는 뉴스들과, 망할 월드컵, 그리고 간당간당한 타인과의 관계들을 부여잡고 싶은 번뇌들이 나를 계속 구석으로 몰아넣는 기분이다.

나는 샤머니스트라고는 할 수 없지만 대체적으로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겹치는 운명적인 신호들에 매우 민감하다. 지금 나에게 닥쳐오는 시그널들이 의미하는게 과연 뭔지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다.

 

수경 스님이 잠적하셨다. 수경 스님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 꽤 오랫동안 환경 운동을 하셨던 분 정도로만 알고 있다. 얼마전 4대강 사업을 반대하며 소신봉양하신 문수 스님의 일로 충격을 받고 매우 괴로워 하셨다고 한다.

문수 스님이 소신공양을 하신 것도 충격적이지만 나는 그 사건이 묻혀버리는 일련의 과정들이 더 충격적이다. 쿠데타로 집권한 폭력과 야만의 시대였다고 믿고 있는 박정희 시대에도 전태일이 분신했을 때 사회적으로 큰 파정이 일어나 대학생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시위에 나섰고, 정치인들도 이 문제에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문수 스님의 소신봉양은 말 그대로 묻히고 있다. 뉴스로 보도조차 잘 되지 않고, 자세히 쳐다보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소식조차 들리지 않는다. 돈 몇 푼 벌어보겠다고 영혼을 팔아먹는 벌판이 바로 여기다.

얼마전 로마에서 꽤 큰 시위가 있었는데 기자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적 있다. 다를게 아무 것도 없다. 아니 오히려 더 천박하고, 더 야만적이다.

 

수경 스님이 글을 남겼다. 그 분 처럼 훌륭한 사람은 못되었지만, 나 역시 길을 떠나고 싶다. 그리고 바위 옆에서 졸다가 죽으면 좋겠다.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떠납니다.
먼저 화계사 주지 자리부터 내려놓습니다.
얼마가 될지 모르는 남은 인생은
초심으로 돌아가 진솔하게 살고 싶습니다.

"대접받는 중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
초심 학인 시절, 어른 스님으로부터 늘 듣던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그런 중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칠십, 팔십 노인분들로부터 절을 받습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 이상은 자신이 없습니다.

환경운동이나 NGO단체에 관여하면서
모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비록 정치권력과 대척점에 서긴 했습니다만,
그것도 하나의 권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원력이라고 말하기에는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을 보면서 제 자신의 문제가 더욱 명료해졌습니다.
'한 생각'에 몸을 던져 생멸을 아우르는 모습에서,
지금의 제 모습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저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제 자신의 생사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 살면 제 인생이 너무 불쌍할 것 같습니다.
대접받는 중노릇 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위선적인 삶을 이어갈 자신이 없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납니다.
조계종 승적도 내려놓습니다.
제게 돌아올 비난과 비판, 실망, 원망 모두를 약으로 삼겠습니다.

번다했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어느 따뜻한 겨울,
바위 옆에서 졸다 죽고 싶습니다.

2010년 6월 14일
수경

호포읍 이야기

1. 호프를 보고 왔다. 영화를 보고나니 생각나는 것들 몇 가지.  a) 우선 이 영화의 제목은 "호포읍 대소동"이 더 어울릴 거 같다. "대소동"이라는 나름 전통적인 단어가 들어간 최고 제작비 영화가 됐을 수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