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421

아방가르드가 필요하다

생각해보면, 적어도 내게 있어 모든게 바뀐건 1993년인가 1994년인가 EBS에서 장 뤽 고다르 특집 시리즈(그런걸 TV에서 틀던 시절이 있었다)으로 방영된 Made in U.S.A를 보면서부터다. 창밖으로 들어오던 햇빛이 꽤 괜찮았던 어느 오후.

멋도 모르고 보기 시작한 영화에 나오는 그 생경한 화면과 색상, 그 생경한 소리들. 그 전까지 잘 짜여진 내러티브 중심의 스토리 텔링 영화(흔히 헐리우드 영화라고 불리는)에 익숙해있던 나는 그 영화를 통해 영화를 보는 새로운 방법을 배웠다고 생각된다.

영화는 줄거리만 전달하는 매체는 분명히 아니다. 화면이 나오고, 소리가 들리고, 미장센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이 각자 각자 영화를 위해 존재한다. 단지 줄거리를 영상으로 이야기해 주기 위해 120분어치 필름을 쓰는건 아무리 봐도 낭비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역시 Made in U.S.A였다. 경음악, 클래식의 멜로디컬한 세계를 지나 락앤롤과 헤비메틀을 만나 리프와 리듬에 몰두하고 있던 시절 그 이상한 소음들(소닉 유스였다)은 음악을 듣는 새로운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로부터 크게 성숙하진 못했지만 둘러싸고 있던 기존의 틀로부터 약간의 자유를 얻은 거라고 개인적으로는 의미를 부여한다. 호불호는 있을지언정 적어도 편견으로부터는 떨어져나가기 위해 애쓰게 된다.

기껏해야 새로운 즐거움을 몇개 더 얻기 위한 음악과 영화의 이야기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방가르드 영화로서 Made in U.S,A는 그토록 뛰어난 영화는 아니다. 브레송과 오종, 트뤼포와 워홀, 그리너웨이와 베르히만, 그리고 할 하틀리 등등 꽤 많은 감독들의 불같이 훌륭한 작품들을 만나게 되었지만 그러나, 처음의 충격은 잘 찾아오지 않는다. 마리앵바드 정도가 있으려나.

파시즘의 시절이 끝나고 이태리 지식인들은 알프스 산 아래 모여 기존의 틀을 문화 전선으로부터 흔들어보고자 63그룹이란걸 만들었다. 2차 대전의 후유증이라고 할만한 드골이 점점 도를 더해가던 시절 푸코와 데리다는 68세대라는 이름으로 사회를 마구 흔들어댔다.

기존의 틀이 지닌 거대한 담론은 거기 안에 이미 속해 있는 사람들로서는 쉽게 흔들어지지 않는다. 이미 잘못 만들어져버린 루틴 안에서 멋대로 떨어져 나오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한두명은 떨어져 나올수 도 있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군부의 시절이 지나갔다. 그게 93년이니까 벌써 15년 전이다. 그 시절과 지금 바뀐건 대체 뭘까. 우리를, 그리고 세상을 둘러싼 환경은 완전히 뒤바뀌고 있는데 우리들 머리 속은 과연 그걸 따라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민주주의 버스가 오면 타고, 신자유주의 버스가 오니 또 탄다. 다음 정거장을 향해 이게 대세라고 믿고, 믿지 않는 자들을 배척한다. 자신이 못 알아보는 것들에 대한 적개심들이 넘쳐 흐른다.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해체를 외친 이유는 다 쓸데 없으니까 분해해보자가 아니었다. 제국주의의 모더니즘과 레비스트로스 이후 이어져온 구조주의의 그 견고한 틀 위에서 아무리 조금씩, 조금씩 고쳐봐야 이미 길이 틀려버린걸 바꿀 수 없다는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기 위해, 그들은 루틴을 뒤흔들어버릴 작정을 했고, 언어와 사상은 분해되버렸다. 물론 이 순진한 아저씨들은 나중에 마음껏 이용당해 버렸지만.

누군가 버스를 흔들어야 하고, 우리에게 걸을 수 있는 두 다리가 멀쩡히 붙어있음을 알려줘야 한다. 이렇게 우리를 흔들 수 있는건 지금으로선 문화쪽 밖에 보이지 않고, 아마도 아방가르드가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나는 우리의 문학과 예술계를 빤히 쳐다볼 수 밖에 없다. 결국은 거기서 뭔가 나와야 한다고, 나올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20080418

20대의 우익화 경향

제목에 대한 변명만으로 시작해 놓는것도 이상해 이왕 써놓은거 옮겨놓는다.


1. (가정) 경제적, 정치적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는 기득권층은 절대 맨입으로 이것들을 내놓지 않는다. 예를 들어 대화와 타협으로 노사 관계를 해결해 보자, 성장이 너희들을 가난에서 구원해줄때까지 잠시만 기다려다오 따위 전부 다 헤게모니의 보존을 위한 기득권측의 전략적인 헛소리일 뿐이다 라는게 기본적인 믿음이다.

2. 헤게모니의 보존을 위해 피기득권층에게 압박할 수 있는 일관적인 카드는 연대를 방해하는 거다. 피기득권층 입장으로선 꼭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더라도 세 과시만 가지고도 제도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을텐데, 그것마저 그들은 아까워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같은 처지에 있다라고 인식하지 못하면 이거 뭔가 잘못된거 아니냐라고 따질 힘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런 방해 공작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예를 들어 책 '슬럼'에서 제시한 미/유럽 쪽에서 아프리카/남미/동남아시아를 궁핍으로 몰아넣어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엄두도 못내게한다 같은 방법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언뜻 생각나는 예는 예전에 노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을때 등장한 구사대다. 소비적 마케팅 역시 비슷한 방법론에 속한다.

3. (정의) 아주 러프하게 기존 체제 친화적을 우파, 기존 체제 반항적을 좌파로 정의하자. 또는 성장론자를 우파, 분배론자를 좌파로 분리하는 방법도 있다. 무엇이든 상당히 둔하게 나누는 건데 일반적인 인식을 염두에 둔다.

4. 학생은 언제나 피기득권층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좌파적일 수 밖에 없다가 나의 기본적인 또 하나의 가정이었다. 피기득권층이기 때문에 기득권층에게 연대를 통한 세력의 과시, 혹은 제도 개혁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 없이는 졸업과 동시에 그대로 튼튼한 시스템의 착취 과정 속으로 빠져 들어갈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5. 그렇지만, 목격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대충 IMF이후인 98학번 정도부터, 통계에 의하면 미국의 경우 75년생 정도부터, 프랑스나 영국 등의 유럽도 비슷한 나이대 부터 급격히 우파화 되어가고 있다. 일반화는 언제나 리스크를 안고 가야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평균적(투표 결과의 양상, 여론 조사의 양상) 양상의 측면이다. 당연히 80년생 트로츠키 주의자가 어딘가 있다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다.

6. 자, 왜 이런 일이 생긴걸까라는게 꽤 오랫동안 의문이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나의 가정 1번은 대체적으로 맞는거 같은데 4번이 틀렸기 때문이다.

7. 여기에 대해 세운 나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7-1. (가정) 학생은 언제나 선생에게 반항적이다 : 이건 경험에 의한거라 일반화 하기엔 문제가 있긴 한데 대충 그렇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7-2. 전쟁을 치룬 체제 옹호적 세력에게 68세대, 단카이세대, 베이비붐세대, 386세대는 교육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체제 반항적 세력이 되었다.

7-3. 68혁명, 우리의 전교조 등에 의해 선생 집단의 좌파적 성향이 예전에 비해 두드러졌다. (이 의견도 문제가 좀 있다)

7-4. 그러므로 그들로부터 교육 받은 그 아래 세대들이 우파적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8. 뭐 이 정도다. 어차피 가설이고, 증명할 능력도 없으니 뭐 역시 학생은 선생에게 반항적인게 아닐까 정도 선에서 멈춰 있었다.

9. 미루고 미루던 우석훈 교수의 '88만원 세대'를 드디어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깝깝해져서 몇장 읽고 뒤적거리다 아주 재밌는 부분을 발견했다.

9-1. 자, 우석훈 교수의 의견이다. 약간 정리했고, 내용 설명을 위해 앞에걸 가져다 붙인 것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219페이지 이하를 참조.

체적인 담론의 구조만으로 본다면 전두환 세대로 크게 분류할 수 있는 X세대(70년대 초반생)와 386세대(보통 89학번까지로 본다) / 그리고 유신 세대가 대칭점을 형성하고 있다. 이 구도에서 민주:반민주, 한나라:반한나라, 호남:영남 같은 정치 마케팅 포인트가 등장한다.

이 구도에서 연대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20대는 결국 이 둘 중에서 어느 한편을 선택하거나 자신들에게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을게 뻔한 이 게임에 참가하지 않는 방식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방법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이건 부모 세대인 유신 세대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선배 세대인 전두환 세대를 택할 것인가의 문제인데,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구호를 다 빼고 현실적인 경제 관계로만 분석한다면 지금의 20대는 유신 세대를 지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사무엘슨의 세대간 소득 이전 가설로 생각해본다면 부모 세대의 경제적 상황이 개선되는게 그나마 자신들에게 돌아올 게 있지 전두환 세대의 경제적 상황이 나아진다고 해봐야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10. 내가 가지고 있던 의문에 대해 마주친 최초의 이론적인 설명이다. 뭐랄까, 상당히 그럴 듯 하다는 생각이다. 언뜻 봐선 투박한 단어들로 모델링이 되어있기는 하지만 굉장히 구조적인 느낌이 든다. 좀 더 다듬을 만한 구석이 있지 않을까 싶다. 또한 미국과 유럽에 적용시킬 수 있는지, 이를 통해 일반화가 가능할지가 내가 지니고 있는 의문이다.

어쨋든 결국 공은 20대가 '연대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즉 IMF의 SAP로 돌아간다. 결국은 이게 만들어낸 문제점들을 현 시점 전혀 해결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게 지금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의 시작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안전 장치를 마련하지 못한채(정확히는 마련할 생각도 없이, 더 정확히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라니 -_-) 질주만 하고 있다.

아마도 어딘가 모여 안전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외치는 시점이 아마도 우리 사회가 실질적으로 다시 시작하는 시작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11. 나무가 많은 나라에서 살고 싶다.

발전소

어떻게 할까 하다가 이전 게시물들은 남겨놓고 디벨로핑을 하기로 했다. 예전에 이곳에 한동안 써놓았던걸 다 지운적 있는데 나름 아쉬움도 있길래.

1994년인가 95년인가, 홍대 앞에 드럭, 태권 브이 같은게 하나 둘 생기던 시절 하재봉이 주차장 가는 길 쪽에 만든 카페가 발전소였다. 하재봉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건 (기억이 날 정도의 선에서) 기형도의 수필집 짧은 여행의 기록을 보다가 거기 실린 간단한 평(아마 중앙일보 신문 기사)을 봤을때다. 훨씬 나중 일이지만 장정일이 쓴 독서 일기에도 하재봉이 나왔던 기억이 난다.

어쨋든 이런 저런 이야기도 듣고 그래서 하재봉의 시집을 샀다. 문지사에서 나왔고 비디오/TV 던가 TV/비디오던가 그랬다. 어쨋든 읽어봤는데 솔직히 말해 좋게 말해 언어의 낭비, 나쁘게 말해 쓰레기가 아닌가 싶은 느낌이 강했다.

미쓰비씨를 타고 다니던 하재봉에 대한 이런 생각은 그가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문화 평론가라는 이름을 달고 다니다 마침 유행하기 시작한 영화 평론계로 진출했을때 극대화 되었다.

이런 편견에는 그의 Behavior와 그 이상한 말투에 큰 영향이 있다. 객관적으로 사람을 쳐다 보기엔 너무 어린 시절이었다. 뭐 만약 그가 굉장한 사람이라든가, 혹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면 시정을 위해 노력을 하는 시기가 찾아왔을텐데 아직까지는 그런 일이 없다.




이 이야기를 주르륵 꺼내는 이유는 블로그의 이름을 'A Day in the Life'라는 제목에서 '발전소'라는 제목으로 바꾼데 하재봉에 대한 기억이 개입된거는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기우일수도 있지만, 왠만하면 이런건 확실하게 하고 넘어가는걸 좋아한다.


발전소는 생산의 도구다. 민망할 정도로 직접적인 비유의 객체를 사용한 이유는 말 그대로 생산을 하고 싶어서다. 이미 소비에 관한 블로그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소비가 주는 즉흥성/욕망성/유행성에 대해 뭔가 균형을 이룰 만한 도구가 필요한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여기는 변증법에서 반(反)의 멍석이다.

또한 생산을 위한 소비 블로그를 만들어봐야지 하는 초기의 뜻과는 다르게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 아마도 글 쓰는 능력의 부재로 인한 - 흘러가는걸 어찌할 바 모르고 보고 있는 자신에게 리프레쉬를 좀 해보고자 하는 의도도 있다.

어쨋든 이왕 이렇게 된거 싶어서 구글 어스에서 풍력 발전소도 찾아 캡쳐해 프로필 사진도 붙였다. 남의 사진을 가져다 쓰고 싶지는 않은데 발전소 사진을 붙여야겠다는 의지의 발로다. 이것도 완전 합법적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언제 발전소 사진을 하나 찍게 되면 그걸로 바꿔야지.




생산은 자아 실현을 위한 유일한 도구다. 뭐가 어찌 되었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뭐라도 생산해야 하고, 그게 웃기는 걸수록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남은 웃고 나는 자아를 실현한다.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웃기는'이라고 하니 생각나는게 있는데, 80년대 말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약간 심각했던 시절에 이런 저런 토론이 많이 있었는데 나는 웃기는 삶이 최고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가 안좋은 핀잔들을 들은 적 있다. 또 하나가 있었는데 아무 생각에도 얽메이는것 없이 깃털처럼 훨훨 날라다니고 싶다는 소리도 했던거 같다.

이런 생각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사람을 제외하고는(관계라는건 특별하다) 이것 없이는 못살아를 만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편이다. 예를 들어 샤워는 매일 해야해, 김치가 꼭 있어야 밥을 먹어 이런거 다 훈련으로 잠재울 수 있다. 갑자기 세상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 샤워 못해서 우울해하기 싫고, 혹시 타지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김치같은거 조달하느라 힘빼고 싶지 않다. 사실 이런 간단한 예 말고는 말처럼 쉽게 되지는 않지만...

꽤 헛소리들이긴 한데 집착하는거 같지만 웃기는 이라는 말이 꼭 그렇게 말초적인 의미로만 읽혀야되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이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견했을때 기분이 어땠을까,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을 다 썼을때 기분이 어땠을까 생각해보면 꽤 웃겼을꺼 같은데. 얼씨구~ 결국 다했다 정도. 물론 점잖은 사람들이니 훨씬 더 세련된 방법으로 표현했겠지만 그래도 에센스의 측면에서는 그게 그거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철학이 완전 이론의 꿈을 포기한 경계를 대략 헤겔 이후로 본다면, 헤겔이 1830년인가 죽었으니까 벌써 170년 가까이 흘렀다. 철학은 그 이후 상당히 엉망이 된게 아닌가 싶은데(전술의 측면에서 궁극적인 목표가 버려진 후 좀더 공격적으로 학문의 장에서 자리를 포지셔닝을 했어야했다) 여타의 학문들은 여전히 일반론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건 좀 딜레마인데 보편론을 포기하면 학문의 설 자리가 애매해지고, 특수 상황론을 채택하면 역시 학문의 설 자리가 애매해진다. 결국 뭘 해도 이렇게 될거라면 이왕이면 사람들이 눈치채기 전에 일반론을 한없이 전개해 나가는게 좀 유리하다. 제내들 뭐 좀 하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강하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신의 영역은 언제나 남겨놓는게 인간의 예의가 아닌가 은근히 생각하고 있다.




시장은 본능적이다. 그냥 생각나는데로 이익을 쫓으면 돌아가게 되어있다. 그런 점에서 본능적이다. 케냐 사파리와 같다. 사자는 톰슨 가젤을 잡아먹고, 톰슨 가젤은 풀을 먹고 등등등 뭐 이런 생태계는 누가 와서 일부러 애써 망쳐놓지 않는 한 균형을 유지한다.

그런데 사자가 톰슨 가젤을 다 잡아먹지 않는건 배가 부르기 때문이다. 톰슨 가젤이 풀을 다 먹지 않는건 일부가 사자에게 잡아먹히기 때문이고, 풀을 다 먹어버리면 일부 톰슨 가젤들이 굶어죽는다.

사자가 배가 안부르다면 사자는 배가 터지게 쳐먹어댈테고 지들끼리 더 먹으려고 싸우다 힘센 놈 몇놈만 남고, 톰슨 가젤은 열라 고생하다 멸종위기에 몰리고 풀이 초원을 덮어버리게 될 거다. 참 오묘한 균형이다. 시장 역시 본능에 맞춰 설계되어 있으므로 내비두면 사실 잘 돌아간다.

시장주의자들은 이걸 노리고 있다. 무개입이 만들어내는 완전 균형의 환상적인 신세계.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돈은 아무리 쌓아놔도 배가 부르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시장주의는 내비두면 필연적으로 독과점으로 귀결된다. 결국 국가가 할 일은 제어를 가하는 일이다. 억지로라도 배가 부르게 만들어주고, 더 먹으면 토해내도록 만들어줘야 시장은 더 잘 유지되고 돌아갈 수 있다.

이런건 사실 현대 경제학 교과서와 사회 과학 서적을 조금만 들춰봐도 다 알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걸 안 읽고 있는 사람들이 하필이면 이곳에, 그것도 제일 높은 곳에 잔뜩 쌓여있다.

아바, 우왁, 소음

1. 12월 24일 집으로 오는 버스에는 3명 정도가 앉아있었다. 버스 기사님이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아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댄싱 퀸, 워털루에 이어 김미 김미가 나오는 걸 들으면서 라디오가 아니고 히트곡 메들리 같은 거구나 생각을 하게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