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할까 하다가 이전 게시물들은 남겨놓고 디벨로핑을 하기로 했다. 예전에 이곳에 한동안 써놓았던걸 다 지운적 있는데 나름 아쉬움도 있길래.
1994년인가 95년인가, 홍대 앞에 드럭, 태권 브이 같은게 하나 둘 생기던 시절 하재봉이 주차장 가는 길 쪽에 만든 카페가 발전소였다. 하재봉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건 (기억이 날 정도의 선에서) 기형도의 수필집 짧은 여행의 기록을 보다가 거기 실린 간단한 평(아마 중앙일보 신문 기사)을 봤을때다. 훨씬 나중 일이지만 장정일이 쓴 독서 일기에도 하재봉이 나왔던 기억이 난다.
어쨋든 이런 저런 이야기도 듣고 그래서 하재봉의 시집을 샀다. 문지사에서 나왔고 비디오/TV 던가 TV/비디오던가 그랬다. 어쨋든 읽어봤는데 솔직히 말해 좋게 말해 언어의 낭비, 나쁘게 말해 쓰레기가 아닌가 싶은 느낌이 강했다.
미쓰비씨를 타고 다니던 하재봉에 대한 이런 생각은 그가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문화 평론가라는 이름을 달고 다니다 마침 유행하기 시작한 영화 평론계로 진출했을때 극대화 되었다.
이런 편견에는 그의 Behavior와 그 이상한 말투에 큰 영향이 있다. 객관적으로 사람을 쳐다 보기엔 너무 어린 시절이었다. 뭐 만약 그가 굉장한 사람이라든가, 혹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면 시정을 위해 노력을 하는 시기가 찾아왔을텐데 아직까지는 그런 일이 없다.
이 이야기를 주르륵 꺼내는 이유는 블로그의 이름을 'A Day in the Life'라는 제목에서 '발전소'라는 제목으로 바꾼데 하재봉에 대한 기억이 개입된거는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기우일수도 있지만, 왠만하면 이런건 확실하게 하고 넘어가는걸 좋아한다.
발전소는 생산의 도구다. 민망할 정도로 직접적인 비유의 객체를 사용한 이유는 말 그대로 생산을 하고 싶어서다. 이미 소비에 관한 블로그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소비가 주는 즉흥성/욕망성/유행성에 대해 뭔가 균형을 이룰 만한 도구가 필요한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여기는 변증법에서 반(反)의 멍석이다.
또한 생산을 위한 소비 블로그를 만들어봐야지 하는 초기의 뜻과는 다르게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 아마도 글 쓰는 능력의 부재로 인한 - 흘러가는걸 어찌할 바 모르고 보고 있는 자신에게 리프레쉬를 좀 해보고자 하는 의도도 있다.
어쨋든 이왕 이렇게 된거 싶어서 구글 어스에서 풍력 발전소도 찾아 캡쳐해 프로필 사진도 붙였다. 남의 사진을 가져다 쓰고 싶지는 않은데 발전소 사진을 붙여야겠다는 의지의 발로다. 이것도 완전 합법적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언제 발전소 사진을 하나 찍게 되면 그걸로 바꿔야지.
생산은 자아 실현을 위한 유일한 도구다. 뭐가 어찌 되었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뭐라도 생산해야 하고, 그게 웃기는 걸수록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남은 웃고 나는 자아를 실현한다.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웃기는'이라고 하니 생각나는게 있는데, 80년대 말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약간 심각했던 시절에 이런 저런 토론이 많이 있었는데 나는 웃기는 삶이 최고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가 안좋은 핀잔들을 들은 적 있다. 또 하나가 있었는데 아무 생각에도 얽메이는것 없이 깃털처럼 훨훨 날라다니고 싶다는 소리도 했던거 같다.
이런 생각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사람을 제외하고는(관계라는건 특별하다) 이것 없이는 못살아를 만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편이다. 예를 들어 샤워는 매일 해야해, 김치가 꼭 있어야 밥을 먹어 이런거 다 훈련으로 잠재울 수 있다. 갑자기 세상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 샤워 못해서 우울해하기 싫고, 혹시 타지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김치같은거 조달하느라 힘빼고 싶지 않다. 사실 이런 간단한 예 말고는 말처럼 쉽게 되지는 않지만...
꽤 헛소리들이긴 한데 집착하는거 같지만 웃기는 이라는 말이 꼭 그렇게 말초적인 의미로만 읽혀야되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이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견했을때 기분이 어땠을까,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을 다 썼을때 기분이 어땠을까 생각해보면 꽤 웃겼을꺼 같은데. 얼씨구~ 결국 다했다 정도. 물론 점잖은 사람들이니 훨씬 더 세련된 방법으로 표현했겠지만 그래도 에센스의 측면에서는 그게 그거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철학이 완전 이론의 꿈을 포기한 경계를 대략 헤겔 이후로 본다면, 헤겔이 1830년인가 죽었으니까 벌써 170년 가까이 흘렀다. 철학은 그 이후 상당히 엉망이 된게 아닌가 싶은데(전술의 측면에서 궁극적인 목표가 버려진 후 좀더 공격적으로 학문의 장에서 자리를 포지셔닝을 했어야했다) 여타의 학문들은 여전히 일반론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건 좀 딜레마인데 보편론을 포기하면 학문의 설 자리가 애매해지고, 특수 상황론을 채택하면 역시 학문의 설 자리가 애매해진다. 결국 뭘 해도 이렇게 될거라면 이왕이면 사람들이 눈치채기 전에 일반론을 한없이 전개해 나가는게 좀 유리하다. 제내들 뭐 좀 하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강하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신의 영역은 언제나 남겨놓는게 인간의 예의가 아닌가 은근히 생각하고 있다.
시장은 본능적이다. 그냥 생각나는데로 이익을 쫓으면 돌아가게 되어있다. 그런 점에서 본능적이다. 케냐 사파리와 같다. 사자는 톰슨 가젤을 잡아먹고, 톰슨 가젤은 풀을 먹고 등등등 뭐 이런 생태계는 누가 와서 일부러 애써 망쳐놓지 않는 한 균형을 유지한다.
그런데 사자가 톰슨 가젤을 다 잡아먹지 않는건 배가 부르기 때문이다. 톰슨 가젤이 풀을 다 먹지 않는건 일부가 사자에게 잡아먹히기 때문이고, 풀을 다 먹어버리면 일부 톰슨 가젤들이 굶어죽는다.
사자가 배가 안부르다면 사자는 배가 터지게 쳐먹어댈테고 지들끼리 더 먹으려고 싸우다 힘센 놈 몇놈만 남고, 톰슨 가젤은 열라 고생하다 멸종위기에 몰리고 풀이 초원을 덮어버리게 될 거다. 참 오묘한 균형이다. 시장 역시 본능에 맞춰 설계되어 있으므로 내비두면 사실 잘 돌아간다.
시장주의자들은 이걸 노리고 있다. 무개입이 만들어내는 완전 균형의 환상적인 신세계.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돈은 아무리 쌓아놔도 배가 부르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시장주의는 내비두면 필연적으로 독과점으로 귀결된다. 결국 국가가 할 일은 제어를 가하는 일이다. 억지로라도 배가 부르게 만들어주고, 더 먹으면 토해내도록 만들어줘야 시장은 더 잘 유지되고 돌아갈 수 있다.
이런건 사실 현대 경제학 교과서와 사회 과학 서적을 조금만 들춰봐도 다 알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걸 안 읽고 있는 사람들이 하필이면 이곳에, 그것도 제일 높은 곳에 잔뜩 쌓여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