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6

가상의 귀가 루트

가끔 꿈에 막차를 둘러싼 모험 같은 게 나온다. 타야 되는데 사건이 생기고 늦든지 타든지 뭐 이런 일이 있다. 그냥 피곤하다. 아무래도 막차를 두고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 같은 게 있지 않나 싶다.

아무튼 그럴 때 나오는 노선도를 포함한 귀가 루트가 하나 있다. 좀 예전에 등장했고 몇 번 반복되면서 약간씩 구체적이 되었다. 상당히 복합적인데 기차도 타야하고(의정부-신탄리의 경원선 비슷한 느낌이다), 버스도 타야하고(세 방향으로 갈라지는데 어느 쪽은 빠른데 일찍 끊기고 어느 쪽은 느린데 좀 오랫동안 있는 식이다, 잠실 어딘가 분위기고 버스는 꽤 털털 거린다) 뭐 그런 거다. 지도도 있다.

이런 루트가 머리 속에 들어있는 여타 다양한 노선도들과 함께 잔존해 있다. 사실 딱히 별 생각은 없었는데 어제 갑자기 자다가 깨서 문득 내가 그런 노선도를 알고 있지 - 그것은 실재하는가 - 꿈 전용이었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 속에 잔존해 있는 건 일부러 끄집어 내 기억을 하진 않는다. 예를 들어 부산역에 도착해 해운대로 지하철을 타고 갈 거면 서면에서 갈아타야 하고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는 걸 기억하고 있지만 그런 걸 매번 떠올려서 그게 맞나 확인하지는 않는다. 기억 속 어딘가에 수납되어 있다가 상황이 되었을 때 기억 속에서 올라올 뿐이다. 귀가 노선과 부산 노선은 기억 속에서 아무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언제 이끌려 올라오는 지, 그게 실재인지 가상인지가 다를 뿐이다. 저 귀가 루트도 같은 방식으로 기억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실재인지 가상인지 굳이 확인 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과연 이런 식으로 가상의 무엇인가가 체계적으로 저장되어 있는 기억이 또 뭐가 있을까. 

20200617

상상력의 부재

뭔가 새롭게 일을 시작하는 경우 혹은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경우 임의로 상상한 세상의 모습을 설정하는 경우들이 있다. 예컨대 보아하니 이러이러하게 생긴 거 같으니까 우리는 저러저러한 새로운 방식을 도입한다는 식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런 가정은 문제를 만들어 낸다. 간단히 말해 알고보니 이러이러하게 생기지 않은 경우가 많고 게다가 이렇게 뒤져보니 그렇게 새로운 방식도 아닌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접근에서 어디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오류를 막을 수 있을까. 간단히 생각할 수 있는 건 사전에 모든 경우를 다 검토해 보는 거다. 이를 통해 어떻게 생겼는지 조금 더 선명한 시선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케이스는 주변과의 거리, 주변의 구성에 생각보다 큰 영향을 받는다. 자료 조사자 자체의 한계가 있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더 큰 오해가 생길 수도 있고 그러면 빠져나오기가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 또한 모든 케이스를 다 조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어느 구석에서 어떤 사람들이 뭘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즉 접근 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필요한 건 같은 질문에 다른 대답을 하는 능력 또는 필요한 질문을 만드는 능력이다. 같은 질문에 다른 대답을 해야 하는 이유는 같은 대답을 하려면 그냥 남이 대답한 걸 읽고 지나가면 되기 때문이다. 즉 그런 질문은 애당초 답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다. 

필요한 질문은 더욱 중요하다. 패션의 특징 중에 이런 경우가 많은 데 많은 이들이 뭔가 새로운 걸 보고 입고 자극을 받고 싶어하지만 사실 새로운 게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 아니 그게 무엇인지 자체도 잘 모른다. 그걸 알고 있다면 패션 디자이너나 예술가 같은 게 되면 좋을 거 같다. 아무튼 보통은 뭔가 세상에 나온 걸 보면 그때야 비로소 아, 내가 저런 걸 원하고 있었구나 하고 알게 되기 마련이다. 

모르는 분야의 책을 읽고 뭔가 알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많은 경우 그런 분야가 있었다는 것조차 잘 모르다가 어떤 계기로든 접하고 나면 구획이 생겨나고, 특유의 방식을 알게 된다. 즉 머리 속에 비어 있던 황무지 부분에 밭갈이를 해서 뭔가 심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놓게 되는 기분과 비슷할 거 같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보면 첫번째 의견을 던진 케이스를 마주한 경우 어떤 식으로 대처하는 게 맞을 지 답이 생겨난다. 또한 세 번째 단락에 기대 지금 이 글도 시간을 낭비하는 전형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답이 나와있기 때문이다.

만사, 음색, 포기

1. 다이어리를 쓰게 되면서 펜을 어떻게 가지고 다닐까가 문제가 되었다. 사라사 볼펜을 쓰고 있었는데 너무 커서 다이어리에 들어가지 않는다. 어케어케 검토 후 사라사, 제트스트림, 유니볼, 무인양품 볼펜 등이 공통 규격의 심을 사용한다는 걸 알게 되었...